최근기사

이 기사는 1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이혜정

청주YWCA사무총장

1920년대 식민지조선의 봄, 하얀통치마 저고리위로 부서지는 한낮의 햇볕아래, 계곡물에 발을 식히며 웃고 있는 세여자가 있다. 화사한 웃음이 마치 이들의 삶도 눈부시고 찬란하게 빛날 것만 같다. 그런데 1925년, 세여자 모두 단발머리이다. 한국 사회에 페미니스트 열풍이 시작되는 즈음, 격변의 시대 여성혁명가의 삶을 다룬 조선희 작가의 소설 '세여자'는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시작된다. 우리 사회에서 볼온하다고 금지된 맑시스트와 페미니스트인 여성혁명가의 삶이 앞으로 얼마나 험난할지 예고하는듯하다.

'머리를 잘리우는 그 자신은 쾌할한 용기를 내어가지고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손에 가위를 들고 남의 머리를 자르는 그때는 이제까지 잠재하였던 인습의 편영이 나타나며 몹시 참담하고 지혹한 느낌을 아니 가질 수 없었습니다.(중략) 다 깍은 뒤에 서로서로 변형된 동무의 얼굴을 쳐다보며 비장하고도 쾌활미가 있는긋 웃어버렸습니다. 웬일인지 서로 아지 못한 위대한 이상과 욕망이나 이룬 듯이 무조건으로 기뻤다'

-허정숙 '나의 단발과 단발 전후' 중에서. '신여성(1925년10월호)'

단발머리는 당시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조선인들에게 가장 충격적인 변화였다. 단발머리 여성이 지나가면 사람들은 수군거리고 침을 뱉었다.

남자들이 상투를 자를 때 그것은 봉건왕조와의 인연을 자르는 일이었지만 여자들이 쪽찐머리를 풀어 자르는 것은 '나, 독립된 인격체요'하는 일종의 1인시위였다.

세여자의 삶이 보여주듯, 우리 사회에서 금지된 것에 도전하는 일은 많은 도전과 위험이 뒤따른다.

안데르센동화 중에 금지된 빨간구두를 신었다가 죽을 때까지 춤을 추는 소녀의 이야기가 있다. 가난하고 외로운 소녀에게 필요한 많은 것들이 있었겠지만, 오로지 소녀의 꿈은 빨간구두를 신고 춤을 추는 일이었다. 그 꿈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을 소녀를 엄숙한 사회에서 용인했을리 만무하다. 무난한 갈색이나 튼튼한 검정구두가 아니라 도발적인 빨간구두를 욕망하다니, 그것은 가난하고 외로운 소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불온한 욕망이었다. 가난한 소녀주제에 특이한 취향과 꿈을 갖는 것은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다. 안데르센은 빨간구두의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우리는 동화를 보며, 학교를 다니며 직장을 다니며, 기존질서에 순응한다. 빨간구두를 신은 채 죽음을 맞이하는 소녀가 어리석어 보이고, 교복 치마길이를 짧게 고쳐입고 다니는 여학생을 보며 혀를 끌끌차고, 머리를 길러 레게머리를 한 남학생을 한심하게 본다.

사회는 끊임없이 규칙과 규제, 질서와 관습을 통해 우리에게 경고한다. 빨간구두를 욕망하면 처참한 말로를 맞게 될 것이라고, 그것은 아주 위험하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한다.

왜 사회는 이런저런 빨간구두를 금지하는 데 그토록 열심인 것인가.

기존 질서의 달콤함에 빠져 사는 권력자들은 엄숙한 규율에 묵묵히 순종하는 인간을 키워내는 것, 새로운 사회를 욕망하는 주변인들의 꿈을 뿌리부터 제거하여 불온한 상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들만의 욕망이자 질서일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누리는 현재의 모든 사회문화는 이렇게 볼온한 욕망을 가진 사람들, 큰 길을 두고 샛길을 새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수 있다.

오늘의 나는 비관습적이고 탈일상적인 길을 찾은 이들에게 빚지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숨과 바꾼 불온한 욕망들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경험하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면, '감히' 그 길을 택하고 그 길을 걸어가는 그 과정 자체에서 비로소 살아있음의 생명성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불가능성에의 꿈과 열정을 지켜내면서 그 불가능성의 축을 '가능성'으로 변혁시키는 것이 오늘의 역사라는 사실이다.

가능성과 불가능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가고 창출해 가는 것이다.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

[충북일보]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은 "충북체육회는 더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한다"고 조언했다. 다음달 퇴임을 앞둔 정 사무처장은 26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방체육회의 현실을 직시해보면 자율성을 바탕으로 민선체제가 출범했지만 인적자원도 부족하고 재정·재산 등 물적자원은 더욱 빈약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완전한 체육자치 구현을 통해 재정자립기반을 확충하고 공공체육시설의 운영권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이 수반되어야한다는 것이 정 사무처장의 복안이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학교운동부의 위기에 대한 대비도 강조했다. 정 사무처장은 "학교운동부의 감소는 선수양성의 문제만 아니라 은퇴선수의 취업문제와도 관련되어 스포츠 생태계가 흔들릴 수 있음으로 대학운동부, 일반 실업팀도 확대 방안을 찾아 스포츠생태계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행사성 등 현장업무는 회원종목단체에서 치르고 체육회는 도민들을 위해 필요한 시책이나 건강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의 정책 지향적인 조직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임기 동안의 성과로는 △조직정비 △재정자립 기반 마련 △전국체전 성적 향상 등을 꼽았다. 홍보팀을 새로 설치해 홍보부문을 강화했고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