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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평영

수필가

설 명절 연휴를 시댁에서 지내고 집으로 왔다. 현관문을 연 순간 베란다 창문을 통해 비치는 햇살에서 봄 향기가 물씬 풍겼다. 창문을 열어젖히니 군자란이 꽃망울을 달고 있다. 오랜 시간 추위를 견디며 밀어 올렸을 꽃대가 반갑고 기뻤다. 어쩌면 맏며느리의 책임을 무사히 마친 후의 편안한 마음이어서 더없이 충만했는지도 모른다.

올해는 설을 맞이하는 마음이 여느 때와 달랐다. 작년 12월에 결혼한 큰아들이 결혼함으로써 시어머니 입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댁에서 맞는 첫 명절을 새아기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헤아리게 되었다. 내가 결혼 후 첫 명절을 겪었던 때를 생각하면서 내 며느리만큼은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낯선 곳, 시골인 시할머니댁에서 보내는 명절이니 더욱 부담될 거로 생각했다.

결혼 32년 차 주부인 나도 해마다 돌아오는 명절이 그다지 반갑지 않다. 막상 부딪쳐 일을 하다 보면 그리 힘들 것도 어려울 것도 없는데 왜 그렇게 부담이 되는지 모르겠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란 말이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나는 걱정을 달고 산다.

명절 전날 아침, 미리 준비한 제수祭需를 빠뜨릴까 염려가 되어 목록을 적고 하나하나 지워가며 커다란 가방 몇 개에 짐을 챙긴다. 빠뜨리면 시골이기에 얼른 사러 갈 수도 없기에 신경을 써야 한다. 어차피 맏며느리인 내가 모든 것을 챙겨야 하는데 굳이 시댁에서 제를 올려야 하는 것이 늘 불만이었다. 남편은 큰댁과 아버님 산소가 시댁 동네에 있으니 왔다 갔다 해야 하기에 불편하다는 것이다. 새아기의 입장을 앞세워 애원해도 남편의 마음은 요지부동이다. 고집을 피우는 남편을 보면 답답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선택한 맏며느리인 것을.

시댁에 도착하니 동서가 먼저 와서 어머님과 빈대떡을 부치고 있다. 누구든 늦게 왔다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는데 어찌나 미안한지 나는 앉을 사이도 없이 준비해온 제수를 꺼내서 일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아들 내외가 오고 집안 분위기가 새롭게 바뀌었다. 새아기가 옷을 갈아입고 부엌으로 왔다. 쉬라고 해도 집요하게 일거리를 달라기에 꼬지 산적 재료를 내주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도와주지 않던 아들도 새아기 옆에 자리를 잡고 둘은 서툰 손놀림을 하였다.

설날 새벽 아침, 거실에서 자던 나는 수돗물 소리에 잠이 깼다. 소등小燈만 켜진 부엌에서 어머님은 무언가를 하고 계셨다. 나는 더 자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떨치고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잠시 후 동서와 새아기가 시간을 두고 차례로 일어났다. 남자들은 코를 골며 달콤한 잠을 자고 있는데 음식을 해야 하는 며느리들의 책임과 의무가 무서웠다. 절 몇 번 하면 끝나는 의식행사지만 4시간 이상의 시간을 정성 들여 음식을 만드는 것이다. 명절을 맞기까지 심리적으로 많은 부담을 가졌지만, 마음만 먹으면 뭐든 척척 잘 해내는 것이 또 우리 여자들의 특징이다.

남자들과 조카들이 큰댁으로 차례를 지내러 간 사이 집에 남은 며느리 3대가 차례상에 올릴 음식을 준비한다. 목기를 마른 수건으로 닦고 과일을 씻고 전날 준비한 여러 가지 전과 과자를 내다 놓는다. 새아기는 어느새 시할머님 옆에서 목기에 음식을 담고 있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단아하고 예쁘게 쌓아 올린 음식을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이어지는 시할머니와 작은엄마의 칭찬에 새아기의 볼에 물이 들었다.

조상님께 가족들의 건강과 안녕을 부탁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음식을 올린다. '홍동백서, 조율이시, 좌포우혜' 등 규칙을 지키며 잘 차려진 차례상을 바라보니 그동안 힘들었던 마음은 무언가를 해낸 뿌듯함으로 녹아내린다. 문득 구상 시인의 '꽃자리'란 시가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너의 앉은 그 자리가/바로 꽃자리니라/ 이하 중략.

숙제를 잘 끝낸 학생의 마음으로 군자란의 꽃망울을 바라본다. 긴 시간의 고뇌를 겪어야 비로소 피어나는 꽃처럼, 나는 내가 선택한 내 꽃자리에서 행복이라는 인생의 꽃을 피우고 싶은 소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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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