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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숙

수필가, 원봉초병설유치원교사

길가에 줄지어 서있는 무표정한 나무들 사이로 비가 쉬지 않고 내렸다. 토요일 아침 일찍 지인에게 탑 차를 빌려 타고 비를 뚫고 나섰다. 청주를 출발 할 때부터 내리던 비는 인천에 도착하자 개어 있었다. 비 그친 하늘은 쏟아낸 비의 무게만큼 가벼워 진 듯 맑게 웃고 있었다. 젖은 하늘 한 귀퉁이를 손가락으로 누르면 무지개가 쑤욱 빠져나올 것만 같았다.

"빨리 좀 가져가~! 집도 비워줘야 하는데 골치 아파 죽겠다." 언니가 며칠 째 전화를 했다. 십년 째 옷가게를 하던 언니가 옷가게를 접었다. 접은 지 두 해가 지났지만 재고 처리를 못해서 골치를 앓고 있다고 했다. 판매를 하려고 일본에서 컨테이너 박스로 들여온 옷인데, 팔지 못하고 쌓아둔 게 한 트럭은 된다고 했다. 이미 두 사람이 훑고 갔고, 남은 것은 작은 사이즈 옷이라 가져갈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했다. 어디 작은 사람이 나뿐이겠는가. 그저 남보다는 동생을 주고 싶었으리라. 방학 때 간다고 하자 하루라도 빨리 가져가라고 성화였다.

옷이 보관되어 있다는 창고로 갔다. 재 개발지에 있는 허름한 집이었다. 녹슨 철문을 따고 들어서자마자 나는 비명을 질러대고 말았다. 희끄무레한 살덩이가 거실 한 복판에 널부러져 있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것 같았다. 벌거벗은 여자 마네킹들이 거실 한가운데에 벌렁 누워서 부릅뜬 눈으로 천정을 응시하고 있었다. 팔과 다리는 빼서 조신하게 옆에 두고 아무렇게나 몸통만 누워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으로 한 발 들어서자 팔위로 서늘한 액체가 뚝 떨어졌다. 깜짝 놀라 또 한 번 소리를 질렀다. 천정에서 떨어진 빗물이었다. 가슴을 쓸어 내리며 방문을 슬쩍 밀자 꼬마 마네킹 한 쌍이 속옷만 입은 채 서있었다. 그 옆 배가 불룩한 마대 자루들이 벽에 몸을 기댄 채 지친 듯 서 있었다. 언니는 자루를 거실로 끌고 나와 풀어 헤쳤다. 이년을 묵혀 두어서 옷이 구겨지고 눌러 붙고 상태가 영 시원치 않았다. 그래도 고르다 보니 입을 만한 것들이 속속 눈에 들어왔다. 이것저것 주워 담으니 5마대가 되었다. 탑 차에 옷들을 싣고 3시가 되어서야 늦은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은 후 이번에는 언니 집으로 갔다. 집에 있는 가방이랑 신발을 정리해야 한다고 했다. 언니 집으로 가서 이것저것을 정리하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한 30년은 옷이랑 신발은 안사도 될 것 같았다.

요즘은 모든 게 풍요롭다 그래서인지 버리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아파트를 산책하다 보면 쓸 만한 물건들이 종종 눈에 들어온다. 그것을 볼 때면 양가감정이 들곤 했다. 한 편으로는 우리 사회가 그만큼 풍요로워진 것이 감사하다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그렇게 귀한 줄 모르고 버리며 낭비하는 것이 안타깝기도 했다. 체형 변화가 거의 없는 나는 옷을 거의 사지 않고 살았다. 대학 시절 입었던 티마저도 아직 입을 만 했다. 게다가 언니나 동생 그리고 주변의 지인들이 몸이 불어서 옷이 맞지 않는다며 수시로 옷을 준다. 물론 새 옷은 아니다. 그렇지만 잘 손질해서 입으면 명품이 부럽지 않다.

하루를 되짚어 보았다. 긴 하루였다. 하루의 터널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터널이 밝아 오기 시작 하면서 나의 욕심이 보이는 듯했다. 옷을 싹쓸이 해 온 것이 내가 과욕을 부린 건 아닐까. 5마대의 옷을 마다 않고 가져온 것이 지나친 소유욕인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미니멀리즘을 주장하면서 정작 나는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게 맞을까. 얼마나 나를 버려야 온전히 나를 버리며 살 수 있을까. 물욕은 비우고 가슴은 채우며 살자고 내게 속삭여 보았다. 꼭 필요한 옷만 남기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야겠다. 비에 젖어 무표정했던 나무를 바람이 쓸고 지나가고 청주 창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무게를 비우며 무게로 떨어지는 비를 보며 비우며 가벼이 살자고 혼잣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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