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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충북도민의 추석 '눈물로 달에 새긴 고향'

장경희·진희씨 생활고 탈북 후 영동에 귀촌해 포도농사 시작
언어장벽·농사 등 어려움에도 군농기센터·주민 도움 큰 힘
명절 때면 부모·친구 그리워 …올 추석 송편 빚고 차례 계획

  • 웹출고시간2017.09.28 17:34:40
  • 최종수정2017.09.28 17:34:40

영동산골로 귀농한 탈북민 장경희(가운데)·진희씨 자매와 올케 김지은(왼쪽) 씨가 고향얘기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다.

ⓒ 손근방기자
[충북일보] "하루빨리 통일돼 고향땅을 밟아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민주지산 자락 영동 산골로 귀농한 탈북민 장경희(42)·장진희(38)씨 가족들은 악착같이 농사지으며 정착의 희망을 일구어 가고 있다.

언니 경희 씨는 지난 2015년 인터넷을 통해 영동으로 귀농을 결심한 2년차 초보농부.

동생 진희 씨도 언니 따라 인천에서 귀촌했다. 영동은 경희 씨 남편이 생각하는 고향의 농촌풍경과 너무나 닮아 선 듯 결정했다.

여기에 남동생 호근 씨도 11월이면 영동으로 합류하기 위해 동생 집 옆에 터를 마련하고 집을 짓느라 한창이다.

이 자매들은 남편과 함께 북한에서 농사라고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포도를 재배하며 하루하루 부농의 꿈을 키우고 있다.

비록 초보지만 지난해는 3천960㎡(1천200평) 밭에서 포도(세래단)를 팔아 1천만 원을 남기기도 했다. 수확의 기쁨을 맛본 것이다.

만족할만한 결과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 땅에서 1년간 피땀 흘려 처음생산한 포도이기 때문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선물이었다.

올해는 작황이 좋지 않아 기대는 않고 있는데 10월 수확이 끝나면 시설 하우스로 바꿀 계획으로 준비 중이다.

동생도 언니 부부를 도와 농사를 열심히 배우고 있다. 자매가 힘을 합쳐 포도주산지인 영동에서 포도로 승부를 걸어 볼 작정이다.

장 씨 부부의 포도농사는 처음부터 순탄치만은 않았다.

영동산골로 귀촌할 탈북민 장근호(오른쪽)·김지은 씨 부부가 여동생 장진희(왼쪽) 씨 집 옆에 집을 짓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 손근방기자
첫해는 가뭄에 태풍 등으로 당도가 떨어지는 등 수확량도 적었다. 괜히 귀농했나 하는 후회도 들었다.

주변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다 기술역시 없다 보니 두려움과 걱정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힘이 되어 준 것은 농업기술센터였다.

초기 영농이 부족한 탈북민 귀농인들에게 영농기술을 가르쳐 준 것이다. 토질분석, 비료주기, 병충해 방재 등 현장을 수시로 나와 살피며 기술지원을 도왔다.

경희 씨 자매와 남편 등은 처음 접하는 영농기술이기에 빼놓지 않고 하나라도 배우려고 하는 노력이 대단했다.

까다로운 성격인 남편 역시 열정은 대단했고, 이렇게 해야 앞으로 통일이 되면 잘 살고 있는 모습을 고향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다는 신념에서였다.

경희 씨 탈북은 2001년도다. 지병으로 갑자기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생활이 막막했다.

두 동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함경북도와 가까운 두만강을 건넜다. 야간을 이용해 얼어붙은 강을 무작정 달렸다.

동생들을 생각하니 무섭거나 두려워야 할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다.

남한에 있는 큰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탈출에 성공한 경희 씨는 중국 연변에서 2년간 생활을 했다. 하지만 북에 두고 온 동생들이 그리워 울며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 북으로 들어가 동생을 찾았는데 동생들도 중국으로 건너간 이후였다.

중국으로 다시 탈출한 경희 씨는 3국을 거쳐 남한으로 무사히 올 수 있었다.

큰 아버지는 중국에서 이산가족을 찾는 KBS의 방송을 보고 편지 한 것이 연락이 닿았다.

동생들도 큰 아버지가 도와 2006년 남한으로 오는데 성공했다. 탈출과정은 우리가 상상했던 그 이상이었다. 먹고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탈북을 결행했고, 고난의 행군이 이들을 탈북하게 한 결정적 이유가 됐다.

경희 씨 자매와 남동생은 하나원에서 만난 같은 처지의 탈북민과 결혼했다.

이들이 가정은 꾸렸어도 남한 사회의 문화나 언어 장벽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때 취업을 위해 캐나다로 갔지만 결국 실패하고 다시 한국행에 몸을 실었다.

이렇듯 이들은 남한에 왔어도 귀농·귀촌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제 영동에서 뿌리내리기 위해 경희 씨 자매는 마을의 대소사 일까지 한다. 축제가 열리면 자원봉사를 자청했고, 남편은 마을주민들의 추천으로 새마을과 영농지도자 일까지 맡았다.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책임감도 강해 마을일을 보기에 안성맞춤이란다. 부모님을 생각해 마을 어르신 공경도 남다르다. 이웃과 함께 화합하며 친인척처럼 지내고 있다.

어느새 이들 자매들은 영동사람이 돼 가고 있었다. 경희 씨는 영동경찰서와 영동군의 도움으로 기간제 근무도 하고 있다.

같이 근무하는 전인철씨는 "장 씨가 똑 소리 나게 일을 잘 한다"며 "힘들텐 데도 직장일이 끝나면 포도밭에 가서 또 일을 한다. 억척스럽고 근검절약하며 사는 것을 보면 배울 점이 많다"고 장 씨의 강한 생활력을 귀띔해 줬다.

주간엔 기간제 일로 야간엔 농사와 가정일로 눈코들새 없다.

특히 자매 부부가 낳은 6명의 자녀들은 아이들이 없는 마을에 생기를 돌게 했다. 손주처럼 챙겨주기도 한다. 이제 4가족의 남동생까지 합류하면 마을은 더욱 시끌벅적 할 것이다.

특히 경희 씨 자매는 고향생각이 나면 고향의 별미인 두부 밥을 해 먹곤 한다.

동생 진희 씨 집에 모여 고향얘기로 시간가는 줄 모른다. 무모님 사진하나 챙기지 못한 채 탈북한 것이 후회스럽기도 하다.

명절 때면 특히나 생각나게 하는 것은 부모님 얼굴과 친구들, 고향산촌이다. 탈북 16년차인 경희 씨로서는 더욱 그리워 하고 있다.

이럴 때면 글쓰기를 좋아한 경희 씨는 시와 소설 등을 시간 나는 대로 지어보고 카톡 등을 통해 그리움을 달래고 있다.

경희 씨 3자매의 올 추석은 송편도 빚고 차례도 지낼 계획이다. 언젠간 이루어 질 통일에 대한 소원도 둥근 달을 보며 빌어볼 생각이다.

삶의 여유를 점차 찾아가고 있는 경희 씨 가족들은 공기 좋고 인심 좋은 따뜻한 영동산골에서 포도만큼이나 정착의 희망도 익어가고 있다.

경희 씨는 "부모와 같은 언니를 보고 있는 동생들을 생각하면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주변에서 도움으로 이제는 큰 어려움과 불편 없이 주민들과 함께 영동사람으로서의 제2의 고향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열심히 살다보면 통일이란 좋은 일도 있지 않겠느냐"며 "지역에서 필요로 한 주민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영동 / 손근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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