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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규

상당고 교장·교육학 박사

사람이 삶에서 누리고자 하는 것이 복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병조참판 오대익의 수연 축하 글에서 淸福과 熱福으로 복을 나누었다. 외직에 나가서는 대장군의 깃발과 허리에 인끈 두르고 음악 소리를 벌여놓고, 내직으로 와서는 비단옷에 높은 수레 타고 대궐문으로 들어가서 묘당에 앉아 사방 다스릴 계책을 듣는 것이 열복이다. 깊은 산속에서 살며, 거친 옷에 짚신을 신고 맑은 못가에서 발을 씻고 고송에 기대어 휘파람을 분다. 집에는 거문고와 경쇠를 두고 바둑판 하나와 한 다락의 책을 갖춘다. 마당에는 백학 한 쌍을 기르며 건강에 좋은 약초도 심는다. 도사와 왕래하는 즐거움으로 세월이 가는 것도 알지 못한다. 조야가 잘 다스려지는지에 대해서도 듣지 않는다. 이것이 청복인데 하늘이 아껴 잘 주지 않으므로 열복을 얻은 사람은 많지만 청복을 얻은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단다.

황상이 다산에게 주역을 배우던 중 이괘가 무망으로 변하는 효사의 '밟는 길이 평탄하니 유인은 곧고도 길하다(履道坦坦 幽人貞吉)'는 글에 감탄을 하자 다산 선생이 황상에게 써준 「제황상유인첩」에 유인의 모습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요지는,

산 좋고 물 맑은 곳에 땅을 골라 나침반이 정남향을 가리키게 서너 칸 띳집을 엮는다. 장식은 정교하며 설화지로 도배하고, 상인방에는 산수화를 붙인다. 문 옆에는 문인화나 시를 써 놓는다. 방안에는 서가 두 개에 1천권 이상의 책을 두되 경전부터 기보와 거문고 악보까지 두루 갖춘다. 책상 위에는 논어를 펴 놓고 화리목 탁자에 도연명 등 중국 시집을 올려 두고 밑에는 오동 향로에 조석으로 옥유향을 피운다. 가림벽 뜰 안에는 국화와 석류 치자 화분을 놓는다. 마당 오른편에는 작은 연못을 파서 대나무 홈통으로 산 샘물을 길어 붕어를 기르고 넘치는 물은 남새밭으로 흐르게 한다. 남새밭에는 아욱과 배추 등 채소를 심고 오이와 고구마도 놓는다. 봄여름 바뀌는 계절이면 밭에서 매운 향기를 맡을 수 있어야 한다. 마당 왼 켠의 사립문은 하얀 대로 만들고 대나무 난간을 두른 초가 정자도 짓는다. 시내를 따라 조금 떨어진 곳에 큰 방죽이 있고, 달 밝은 밤이면 시호와 묵객과 더불어 작은 배를 띄워 퉁소불고 소금 뜯으며 방죽을 서너 번 돌아 술 취해 돌아온다. 제방에서 멀지 않은 절에 초탈한 스님이 있어 참선과 설법을 들으면 더 좋다. 집 뒤에는 소나무가 있고, 솔 아래에는 백학 한 쌍이 있다. 소나무 북쪽에는 잠실을 두어 아내가 따르는 송엽주를 마신 뒤에 방서를 읽으며 마주 보고 웃는다. 문 밖에서 조정에서 부르는 조서가 왔다는 소리가 들려도 웃으며 나아가지 않는다.

집터 보는 것부터 실내 장식과 원포 꾸리는 법, 초가 정자 및 잠실까지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이것이 황상의 일속산방으로 정리되었겠으나 아직 볼 기회가 없었다. 그렇지만 년 전에 본 다산초당에서 유인의 처소를 살필 수는 있었다. 좀 더 공부하고 갔더라면 초당에서의 감회가 더 깊고 시렸을 텐데.

이 글을 보자 퇴임 뒤 시간을 꾸릴 숙제가 풀린 기분이다. 가만히 보니 우리 집 거실 다탁 위에 다구를 진설하여 차를 마시고 청자투각향로에서는 침향연이 피어오르고, 책상에는 여러 분야의 책들과 거문고 대금 악보도 있네. 집 안에 소나무를 비롯하여 5백년 명문가에 거의 있다는 마당바위와, 대나무 사립문 대신에 하얀 철제 대문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집 앞에 실개천도 흐르고, 연못은 못 두지만 문 앞에 손바닥만 한 남새밭도 있어 여기서 채소랑 먹거리를 기르며 밭 냄새도 맡을 수 있다.

외부 여건을 보면 선생처럼 유인 모양을 내겠으나 여유롭고 반듯한 마음이 문제다. 공부하며 선한 사람과 교류하고 시간을 선용한다면 유인으로 청복을 누리며 곧고도 길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빗소리를 들으며 이런 허망한 상념에 드니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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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