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12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이재준

칼럼니스트

한 나라의 수도들은 대가 큰 강을 끼고 건설되었다. 고구려는 주몽이 처음 '구려'라는 땅에서 흩어진 여러 부족을 규합하였지만 통구하(通溝河) 연안에 도읍을 정했다.

백제는 아리수에서 나라를 열었다. 아리수란 지금 한강의 우리말 표현이다. 신라는 경주 형산강에 살던 육부(六部)가 모여 박혁거세를 옹립한 것이다.

고구려남침으로 개로왕의 죽음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당한 백제는 웅천(熊川)으로 내려가 나라의 명맥을 유지한다. 웅천은 바로 곰내이며 바로 금강이다. 곰은 '크다'는 우리말로 한자 '웅(熊)'을 차자한 것이다.

소백산 서편 산간 물줄기가 모여 비단강을 만들었다. 금강은 또 소백산준령을 넘은 신라가 백제 제어를 위해 중요한 거처로 생각한 것이다. 보은 영동 청주지역이 나-제간 치열한 공방의 역사로 물들여졌던 것은 이런 지정학적 이유 때문이었다.

백제 성왕은 국력이 커지자 수도를 부여로 옮긴다. 사실 웅천은 넓지 않은 곳이라 일국의 수도로서는 불편한 점이 많았다. 부여는 백마강이 지역을 휘감았으며 바다로 나가기 편한 곳이었다. 중국과의 교류와 일본과의 왕래에 아주 적합한 지역이다. 다만 주변에 험준한 산이 없어 안보에는 취약하지만 국세가 약한 신라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성왕은 부여 왕도를 어떻게 건설했을까. 현 부소산록에 왕궁을 짓고 궁남지로 가는 길에 주작대로(朱雀大路)를 건설했다. 이는 한나라 장안성(長安城)의 예를 모방한 것이다. 그리고 왕성을 방어하기 위해 토성으로 긴 나성(羅城)을 쌓았다. 나성의 유구는 부여읍 남창리에 일부가 지금도 남아 있다. 전장이 84km나 되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왕성은 매우 장엄하고 화려 했을 게다. 지금 일본 나라, 오사카, 교또 등지에 남아있는 고대 건축물은 백제의 잔영이다. 궁성 안에는 제적사(帝釋寺.지금의 정림사)와 여러 개의 사찰이 세워졌으며 도시는 바둑판 같이 정연했다.

부여는 당시 일본인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구다라 나이(백제가 없네)'라는 말이 유행 정도로 인기가 있었던 곳이었다. 구드레 나루는 일본에서 백제로 오는 사신과 유학생들로 북적댔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상상하면 백제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연한 문화도시였다.

백제는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무너졌다. 신라 침공 대비를 소홀히 한데다 당나라군이 바다를 건너온다는 것을 예상 못했다. 의자왕은 부여에 있는 1만여명의 시민, 군사들과 함께 18만 나당 연합군과 싸웠다.

승부는 일찍이 결정 났다. 의자왕은 황급히 시종들을 데리고 웅진으로 피난을 간다. 이 것이 패착의 원인이었다. 그가 험준한 자비성(청양 칠갑산 두솔성)으로 피난하고 여러 성의 지원을 독려했다면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의자왕은 웅천성에서 부하 장군 예식(禰植)에게 배신당하여 소정방에게 백기투항하고 말았다.

전쟁 후 부여왕도는 처참히 파괴되었다. 궁성은 불타고 화마를 입은 민가에도 사람들이 살수 없었다. 3천궁녀의 원혼이 서린 백마강은 통곡의 강이 되었다. 지금도 부여시가를 발굴하면 당시 불탄 건물의 잔해와 깨진 토기들이 참상을 말해주고 있다.

부여에서 최근 '사비 야행(夜行)'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식이다. 부소산성 후문에서 사자루 까지 야간조명을 설치해 산책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백마강 달밤시장도 밤늦게 까지 운영되고 있다. 1천4백년만에 어둠을 깬 '불야성 사비'의 모습이다.

'백마강 달밤'은 기성세대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소재다. 필자도 한번 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사드여파로 중국 관광객이 줄어드는 때인데 다른 시.군에서도 부여처럼 새로운 아이디어를 많이 개발했으면 한다.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

[충북일보]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은 "충북체육회는 더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한다"고 조언했다. 다음달 퇴임을 앞둔 정 사무처장은 26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방체육회의 현실을 직시해보면 자율성을 바탕으로 민선체제가 출범했지만 인적자원도 부족하고 재정·재산 등 물적자원은 더욱 빈약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완전한 체육자치 구현을 통해 재정자립기반을 확충하고 공공체육시설의 운영권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이 수반되어야한다는 것이 정 사무처장의 복안이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학교운동부의 위기에 대한 대비도 강조했다. 정 사무처장은 "학교운동부의 감소는 선수양성의 문제만 아니라 은퇴선수의 취업문제와도 관련되어 스포츠 생태계가 흔들릴 수 있음으로 대학운동부, 일반 실업팀도 확대 방안을 찾아 스포츠생태계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행사성 등 현장업무는 회원종목단체에서 치르고 체육회는 도민들을 위해 필요한 시책이나 건강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의 정책 지향적인 조직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임기 동안의 성과로는 △조직정비 △재정자립 기반 마련 △전국체전 성적 향상 등을 꼽았다. 홍보팀을 새로 설치해 홍보부문을 강화했고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