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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란

더위가 계속되면 잠 맛에 입맛까지 달아난다. 매일 먹는 밥도 그렇고 즐겨먹던 음식도 시들해진다. 이럴 때 생각나는 게 결혼 전 친정에서 먹던 음식이다. 입맛이 변하나 보다. 배부른 소리인지 몰라도 요즈음은 맛 나는 게 없다. 어쩌다 먹게 되는 성찬 앞에서도 다른 반찬 다 놔두고 어릴 적 먹던 나물이니 야채류, 장아찌 등에 손이 더 간다. 어느 땐 나만 그런가 둘러보면 비슷한 연배 분들도 젓가락의 방향이 크게 다르지 않은데 단순히 우연인지는 모르겠다.

내남없이 어려웠던 시절, 어릴 적 밥상에 오른 반찬은 소박하고 단순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장아찌. 김치. 깍두기, 깻잎. 고추장, 된장, 콩자반, 단무지 등 거의 저장 식품이다. 건강 상식으로는 몸에 좋지 않다는 짠맛이 배어 있는 식품이지만 어머니의 노고와 사랑이 있었다. 그저 감사하게 먹었고 지금까지 질리지 않을 뿐 더러 되레 자주 찾는다. 그 중에서도 장아찌는 늙어가면서 고향처럼 찾게 되는 그리움의 음식이다.

해마다 친정어머니는 장아찌가 될 채소를 소금에 절이거나 그늘에 말리셨다. 어찌 보면 펄펄 살아있는 생활세포를 사멸하는 작업이라고 할까 그런 과정이다. 주로 초여름엔 오이, 마늘쫑 가을엔 무를 소금에 절인 다음 서늘한 그늘에 소들소들 말린 후에 된장이나 고추장에 박았는데 나는 고추장에 박은 장아찌를 더 좋아했다. 어머니는 꾸덕꾸덕 해진 무와 오이를 된장이나 고추장에 박을 때 물기가 없나 살피셨다. 물기가 남으면 장아찌가 상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친 장아찌는 입맛 없을 때나 찬(饌)이 마땅치 않을 때 일등공신이 되어 입맛을 돋운다.

며칠 전, 친정에 들렸더니 어머니께서 장(醬)에 박아두었던 무장아찌를 꺼내주셨다. 집으로 돌아와 장아찌를 채로 썬다. 고추장의 불그레한 물이 온몸에 들었다. 무의 결마다 물든 색깔이 너무 고와 채를 썰다 말고 드려다 본다. 문득 스님의 하안거(夏安居)를 떠 올린다. 목욕재계하고 석 달 수행에 들었던 수행자가 이제 선방(禪房)에서 나와 법열(法悅)의 미소를 짓는 것 같다. 겉은 장아찌인데 속은 영낙없이 수행자의 과정이다. 장(醬)에 있는 효소와 오랜 소화 작용으로 장아찌의 재료는 원래세포 기능을 완전히 잃고 더욱 풍미 있는 음식으로 변했다. 그들은 독 속에서 은둔하는 동안 스스로 맛이 밴, 깨달아 나온 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다른 음식과는 무게감과 존재감이 다를 수밖에. 장아찌가 김치류에 속하면서도 기호품으로 분류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장아찌는 참으로 소박한 음식이다. 소박한 음식들이 서서히 멀어지고 있다. 대신 그 자리에 화려하고 자극적이며 재료가 다양한 음식열풍이 불고 있다. TV채널마다 건강식이니 맛짱이니 경쟁적으로 요리가 소개되고 심지어 먹방까지 등장하지만 과연 이토록 음식에 과도하게 휩쓸려 시간을 보내야 하는 가하는 의문이 든다. 사실 우리에게 음식에 대한 여유가 생긴 게 그리 멀지않다. 아니 지금도 어느 하늘아래에선 기아에 허덕이며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우린 알고 있지 않은가. 요즘 대세인 음식열풍은 어떤 면에선 인간의 오만이고 불안이며 요구불만 분출의 소모적 이벤트라고 생각 된다. 음식은 경건하고 소중하며 자연에 대한 겸손이 아닌가.

장아찌에서 인간세상을 바라본다. 내 안의 삭히지 않은 세포들을 사멸하는 시간들이 있기는 했던가. 기꺼이 누군가에게 재가 되어 보았던가. 기꺼이 누군가에 다리가 되어 돌의 무게를 감내한 적이 있던가. 한낱 무 하나가 자신의 세포를 모두 죽이면서 누군가에게 자신을 내어준다는 사실. 그건 겉만 그럴 듯하게 색칠하고 속은 허연 무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때론 한 개의 채소 앞에서도 부끄러워해야할 이유이기도 하다.

장아찌는 은둔자다. 그저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독 속에 몸을 담그고 묵묵히 인내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스스로의 맛을 체득하고 스스로의 맛을 이뤄 세상으로 나온다. 모든 과정이 그저 기꺼이 그저 머문 바 없으니 마땅히 그 자체가 선(禪)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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