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웹출고시간2016.06.14 15:41:17
  • 최종수정2016.06.14 15:41:17

조혁연 객원 대기자

임진왜란 때 최소 10만명 이상의 조선인이 전쟁 포로가 돼 일본으로 끌려간 것으로 학계에서는 파악하고 있다. 왜는 이렇게 끌고 간 조선인 포로의 일부를 국제 노예무역에 이용하였다. 당시 왜는 포르투칼로부터는 조총과 담배를 수입하면서 조선인 포로를 결재 수단으로 사용했다.

일설에 의하면 왜는 조총 1자루를 구입하는데 조선인 피로 40명을 지불하였고, 당시 노예시장이 개설된 곳은 태평양전쟁 때 원자탄 피폭을 당하는 나가사키(長崎)였다. 조선과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왜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1607년(선조 40) 교류를 재개하였다.

조선은 일본에 조선통신사를 파견했고, 당시 부사는 청주가 관향으로 《해사록》을 쓴 경섬(慶暹, 1562∼1620)이었다. 경섬의 조선통신사는 그해 1월 한양도성을 나서 4개월 후에 왜의 수도인 에도(江戶, 현 도쿄)에 도착했다.

당시 도쿠가와 정부는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원했던 만큼 조선인 포로 문제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다.

경섬의 <해사록>이 수록돼 있는 《해징총재》.

"사로잡혀 온 귀국의 남녀들이 각 지방에 흩어져 산 지 20년이 됩니다. 나라 안의 선비들이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줌으로써, 혹 시집이나 장가간 자도 있고 어린 아이를 둔 자도 있습니다. 그들이 귀국할 생각이 없으면 각각 생각대로 해 주고, 고향으로 돌아갈 뜻이 있는 자는 속히 돌아갈 준비를 해주라는 것이 국왕의 엄명(嚴命)입니다."-<해사록 1607년 6월 20일>

윤6월 중순, 경섬의 조선통신사 일행은 귀국길에 올랐다. 이때 소문을 듣고 조선통신사 배가 지나는 해변으로 달려와 "고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외치는 조선인 포로들이 속출하였다.

"오시(午時)에 작은 배를 타고 점포(店浦)를 지나는데, 어떤 남자 하나가 포구의 갈대밭 속에서 달려나와 부르짖기를, "나는 조선 사람이오. 돌아가는 배에 태워 주시오"하므로 배를 멈추어 태워 주었다. 그는 전라도 사람이다. 그 주인이 놓아 보내려 하지 않으므로 도망쳐 와 여기 숨어서 행차를 기다렸다 하니, 그 정상이 가련하다."-<해사록 1607년 윤6월 11일>

함께 귀국하는 조선인 포로들 중에는 아예 자비로 배를 구입해 통신사의 배를 뒤따며 귀국하는 경우도 있었다.

"경상도 울산(蔚山) 등지의 사람 40여 명이 저들대로 배 한 척을 사서 미곡을 가득 싣고 술을 동이에 가득 채워, 돛을 달고 돛대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며 따라왔다."-<〃>

쓰시마 섬과 일본열도 사이에는 일기도(一岐島)라는 비교적 작은 섬이 있다. 이 섬에서 조선통신사의 격군, 즉 노젓는 사람과 그 어미가 16년만에 극적으로 상봉하기도 했다.

"격군 수복(守福)의 어미가, 임진년 난리 때에 포로가 되어 간 곳을 모른 지 지금 16년인데, 그의 어미가 마침 이 섬에 있었다. 우연히 상봉하여, 모자가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들을 같이 배에 태워서 돌아왔다."-<해사록 1607년 윤6월 22일>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때 포로부대를 운영했고, 따라서 우리고장에서도 피로인이 적지 않게 발생했다. 그 가운데 안필득(安必得)이라는 인물이 경섬의 조선통신사와 함께 귀국했다.

"저녁에 충주에 도착하니, 신임 목사 홍사효(洪思斅)가 아직 부임하지 않아서 단양군수 안희(安熹)가 겸관(兼官)의 임무를 띠고 왔다. 그 아들 안필득(安必得)을 쇄환해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해사록 1607년 7월 13일>

/ 조혁연 충북대학교 사학과 초빙교수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