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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수

충북지속가능발전협의회 사무처장

미호천 유역은 선조들의 삶의 흔적과 현재의 삶의 모습이 공존하는 구간이다. 흔적은 구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0만~20만 년 전 주먹도끼가 출토된 청원 만수리 유적, 1만5천 년 전의 볍씨가 출토 된 소로리 유적, 몸돌·쌍날·찍개·긁개·밀대·망치돌 등이 출토된 오창 여천리 유적, 진천 장관리 유적, 봉명동·율량동·복대동 유적 등 곳곳에서 출토되었다. 신석기 청동기 시대를 이어오며 현재까지 삶은 미호천의 물줄기처럼 유유히 흘러 전해오고 있다.

미래하천 미호천 탐사대는 진천읍 송두리 157번지 송두리 구석기유적 출토지를 찾아갔다. 네비게이션에 의지해 찾아간 송두리 유적은 흔적도 발견 할 수 없다. 유적지 위로는 꽃동네 IC로 가는 4차선 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주위에는 박물관은커녕 출토지에 대한 안내표지판 조차 없다. 송두리 유적은 진천에서 진천IC도 확장·포장 공사구간의 구석기 유적에 대한 구제발굴(산업화의 사유로 인한 발굴)에 의해 수면 하에 들어났다. 이곳에서는 2천159점의 구석기 유물이 출토됐다. 대부분 유적지 인근에서 쉽게 구 할 수 있는 석영맥암이나 규암질로 구성됐다. 특히 구석기 유적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주먹도끼, 사냥돌 등이 다량으로 출토 됐다. 인근에는 중기에서 후기 구석기 유적이 출토된 장관리 유적지가 있고 상신리, 신정리, 가산리 일대 지표조사 결과 유물이 수습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구석기 문화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송두리 유적은 두텁게 발달한 토탄층을 통한 탄소연대 측정결과 4만5천~ 5만 년 전에 형성 된 것으로 밝혀졌다. 중부지역 미호천을 중심으로 한 구석기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인 송두리 유적은 산업화의 거센 물결에 다시 땅속으로 묻혀 졌다.

진천군 관계자는 "송두리나 장관리 유적은 발굴 후 도로 공사를 위해 다시 묻었고 유물 전시장은 따로 만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재)선사문화 연구원 이융조 이사장(전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아시아 구석기학회 명예회장)은 "송두리 유적은 대단히 방대한 구석기 유적지다. 도로 개설로 인한 절개면을 살펴봤을 때 유적층이 10만년, 5만년, 3만년 등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것은 미호천을 배경으로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살았던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진천의 역사 문화가 이곳 미호천 유역에서 시작 된 것으로 보여 진다"고 한다.

우리는 산업화로 인해 많은 흔적을 지워 버린다. 선조들의 삶의 흔적은 지워 버리면 다시 찾을 방법이 없다. 이융조 이사장은 "지금이라도 발굴된 유적을 잘 보관하고 아직 발굴되지 않은 주위를 대대적으로 발굴 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진천지역을 발굴하다보면 토탄층이 대단히 발달 된 것을 볼 수 있다. 진천의 쌀이 좋은 것은 땅의 토탄층이 잘 형성되어 그런 것이다. 진천군은 구석기 유적 및 토탄층을 발굴하여 진천의 새로운 동력으로 삼아야한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걸으며 어느 곳에서도 구석기 문화유적의 흔적을 발견 할 수 는 없었다. 다만 봄을 맞이하는 농군들의 손끝에서 선조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명맥만을 바라 볼 수 있었다.

농부의 손놀림이 바쁘다. 늦가을 파종한 마늘은 목에 힘을 잔뜩 주고 있고 올 봄에 파종 할 밭은 고랑이 일구어진다. 농부의 손놀림에는 선조부터 이어져 내려온 울림이 있다. 그 울림에서 구석기 시대부터 시작 한 우리 삶의 여정을 읽을 수 있다. →미호천 탐사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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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 "평범한 직장인도 기부 할 수 있어요." 변상천(63) ㈜오션엔지니어링 부사장은 회사 경영인이나 부자, 의사 등 부유한 사람들만 기부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11월 23일 2천만 원 성금 기탁과 함께 5년 이내 1억 원 이상 기부를 약속하면서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의 충북 72호 회원이 됐다. 옛 청원군 북이면 출신인 변 부사장은 2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부모님을 도와 소작농 생활을 하며 학업을 병행했다. 그의 집에는 공부할 수 있는 책상조차 없어 쌀 포대를 책상 삼아 공부해야 했을 정도로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삼시 세끼 해결하지 못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아버지는 살아생전 마을의 지역노인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했다. 변 부사장은 "어려운 가정환경이었지만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자라왔다"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오늘날의 내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 졸업 후 옥천군청 공무원을 시작으로 충북도청 건축문화과장을 역임하기까지 변 부사장은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나아지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