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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란

수많은 금들이다. 금들은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무늬를 이루었다. 어찌 보면 무늬는 상처와 닮아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상처들이 세월의 때가 묻은 손바닥 같이 태연하다. 아무리 사물이지만 어찌 저렇게 무심해 보일까. 그간 시퍼런 칼날에 괴롭힘을 당하고 짓눌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간혹 매운 몸들이 으깨지고 비릿한 생선의 파닥거림이 전해져도 눈물 흘릴 구멍조차 없다. 그런 도마를 보고 있으려니 왠지 마음이 아려온다.

며칠 전 친정에 들렀다가 진즉에 버려진 줄 알았던 도마가 찬장 구석에 모셔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몇 년 전 모녀가 입씨름 끝에 도마를 버리기로 다짐을 받았건만 결국 도로 제자리가 된 셈이다. 어떤 물건이건 허투루 버리지 않는 어머니를 이해는 하지만 지나치다 싶다. 한 가운데가 움푹 패고 양쪽이 비스름하게 경사를 이룬 것은 차치하더라도 찬장 속에 갇혀 얼룩덜룩 한 쪽 귀퉁이가 썩어 가니 더 이상 제 구실 하기는 어렵지 싶다.

'똑, 똑, 똑, 똑.'

어릴 적, 눈을 뜨면 부엌에서 들려오던 어머니의 도마소리는 언제나 같은 간격으로 단정하게 들렸다. 조심스런 스텝을 밟듯 음률의 폭은 좁지만 너무 고요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경쾌함. 음식을 만드는 부엌살림들의 작은 속삭임들이 듣기 좋았다. 똑. 똑. 똑 도마소리가 그치면 어머니는 4남매의 이름을 부르며 등교시간이 다가옴을 알렸다. 그 때 들리던 도마소리,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사랑과 행복이 충만했고 때로는 불안정한 음도 들려왔던 것 같다.

부엌은 어머니의 영혼이 머무는 곳이다. 어느 날, 단정했던 도마소리가 이상하게 들렸다. 소리는 끊겼다 이어짐을 반복하며 천천히 들려왔다. 감정을 억누르는 듯 낮은 소리는 어머니의 흐느낌 같기도 했고 가부장적인 남자의 여자가 읊는 애잔한 음률로 들려왔다. 나무 도마에는 어머니의 청춘과 사랑이 있고 세월의 기억이 있다. 오직 가족을 위한 절절한 기도가 눈물처럼 스미어 있다. 아내요 어머니며 여성이기 전에 어머니도 한 인간이셨다.

지난 세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셨으며 상처로 쓰라리셨을까. 기실 도마 위에서 요리 재료를 송송 썰고 다지는 일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으리. 그건 사는 일이요 살리는 일이었으리라. 정작 어머니가 힘들었던 것은 삶이라는 도마 위에서 완성해야 할 요리가 아니었을까. 삶이 내리치는 칼날은 어머니에게 쓰라린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묵묵히 받아드리고 품어 인내하셨던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가끔씩 나무도마를 조용한 눈빛으로 바라보신다. 그 눈빛에서 지나간 삶을 돌아보는 촉촉함과 쓸쓸함을 느낀다. 어찌 보면 나무도마는 한 때 어머니에게 여인의 꿈을 건네기도 하고 생활이면서 휴식처요 수행 처였을 것이다. 나무도마가 자신의 운명을 탓하거나 불평을 하지 않듯 지난 시간들을 무심하게 돌아보려 하신다. 그저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의 한 물길이려니, 그 또한 사람 사는 것이려니. 마치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속에서 쓸개를 빼고 도막을 낸 다음 물로 쓸어 내면 언제 핏물이 배었냐는 듯 천연덕스런 도마처럼.

도마를 바라보며 어머니를 생각하고 나를 돌아본다. 얼마나 많은 날을 지나야 상처가 상처 아닌 듯 담담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걸까. 도마 위에 새겨진 수많은 금들이 삶과 죽음처럼, 길처럼 느껴진다. 그 길을 따라 가다 지평선 노을을 바라보고 계신 어머니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아직도 난 어머니의 아픔을 보듬어 드리지 못한 철부지 딸이지 싶다. 가슴 저며도 내색 않으셨던 어머니의 가슴속 무늬를 헤아려본다. 오랜 세월을 지나온 어머니의 무늬는 물빛이다. 그 물빛 속엔 어머니의 무조건 희생의 삶이 한없는 사랑으로 나를 쓰다듬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말없이, 그저 세월의 주름처럼 태연하게 물결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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