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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인물별로 살펴본 조선시대 기자, 史官

"신이 만일 곡필을 하면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조박: 임금이 두려워할 것은 하늘과 史筆이다
민인생: 병풍 뒤에서 엿듣고 사냥터 밀착 동행
채세영: 외압 가해져도 붓만은 빼앗기지 않아
임덕제: 땅을 붙잡고 사도세자 마지막을 기록
조존세: 임란 와중 사초 태우고 도망 '암흑기'

  • 웹출고시간2016.02.18 16:50:42
  • 최종수정2016.02.18 18:29:25

편집자 주

공자는 최초의 편년체 역사서로 일컬어지는 《춘추》(BC 5세기)를 쓸 때 대의명분을 좇아 객관적인 사실만을 엄격하게 기록했다. 이 같은 저술 태도 때문에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는 말이 생겨났고, 지금도 기자정신을 얘기할 때 이 표현은 단골로 사용되고 있다.
청와대 내의 기자들 출입 공간으로, 지난 1990년에 완공된 '춘추관'(春秋館)도 그런 의미에서 건물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시대 기자(記者), 즉 기록자인 사관(史官)은 항상 임금의 곁에 머물면서 춘추필법의 기록을 남기는 것을 정도로 삼았다. 심지어 "사관이 모르게 하라"고 한 그 말까지 기록으로 남겼다.
그러나 일부 사관들은 국가가 전란에 휩싸이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사초(史草)를 불태우고 도망, 역사의 암흑기를 만들기도 했다. 조선시대 사관의 모습을 인물별로 살펴본다.

조선 현종대 사관 이담명(李聃明)이 작성한 사초(史草)이다. 어떤 이유로 세초(洗草)되지 않았고, 광주이씨 문중이 보관하고 있다.

◇ "사관은 선행 모두를 만세에 남기는 것"

조박(趙璞, 1356~1408)은 고려말과 조선초의 양조(兩朝)를 산 인물로 우리고장 청주목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사관이 되어 임금과 대신의 토론공간인 경연(經筵)에 참여하려 했으나 2대 임금인 정종이 꺼려하였다. 그러자 임금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군(人君)이 두려워할 것은 하늘이요, 사필(史筆)입니다. 하늘은 푸르고 높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리(天理)를 말하는 것뿐입니다. 사관은 인군의 착하고 악한 것을 기록하여 만세에 남기니, 두렵지 않습니까."-<정종실록 1년 1월 7일>

실록은 '상(정종)이 그렇게 여겼다'(上然之)라고 적었다.

◇ "사관이 모르게 하라", 그 말까지 기록하다

조선 초기의 사관 민인생(閔麟生)은 생몰 연대가 정확하지 않으나 태종대를 산 인물로 나타난다. 조선 사관역사 가운데 가장 에피소드한 장면이 그로부터 작성되었다.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태종(이방원)이 편전(便殿·일종의 휴식공간)에까지는 들어오지 말라고 하자 이렇게 설전을 벌였다.

태종: "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

민인생: "비록 편전이라 하더라도, 대신이 일을 아뢰는 것과 경연(經筵)에서 강론하는 것을 신 등이 만일 들어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갖추어 기록하겠습니까."

태종: (웃으며) "이곳은 내가 편안히 쉬는 곳이니, 들어오지 않는 것이 가하다. 사필(史筆)은 곧게 써야 한다. 비록 대궐[殿] 밖에 있더라도 어찌 내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

민인생: "신이 만일 곧게 쓰지 않는다면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그의 이런 강골은 지존 태종이 '(얼굴이 팔리니)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는 그 말까지 실록에 기록했다.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 하였다."-<태종실록 4년 2월 8일>

그의 이 같은 찰거머리 춘추필법 정신은 병풍 뒤와 사냥터를 가리지 않았다. 그러자 태종은 민인생에게 직접 말은 하지 못하고 다른 대신에게 '왕짜증'을 냈다.

"조회에서 물러나, 임금이 김여지(金汝知) 등에게 일렀다. "예전에 사관 민인생이 경연 때 병풍 뒤에서 엿듣고, 곧장 내연(內宴)으로 들어왔었다. 또 내가 들에 나가 매사냥을 할 때 얼굴을 가리우고 따라왔으니, 이런 것은 모두 음흉한 짓이다.""-<태종실록 12년 11월 20일자>

민인생은 이때 밉보였는지 금성(지금의 강원도 김화) 현령에 임명됐으나 곧바로 파면되었다. 죄목은 강릉 관기 소매향(小梅香)을 데리고 부임했기 때문이었다(태종실록 9년 5월 27일).

류숙(劉淑)이 그린 <세검정도>(洗劍亭圖) 부분.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사초는 실록 편찬에 사용된 후 세검정 일대 하천에서 재사용을 위해 세초됐다. 세검정은 서울 종로구 신영동에 위치한다.

◇ "史筆은 아무나 가지는 것이 아니다"

채세영(蔡世英, 1490~1568)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기묘사화가 그가 사관으로 있을 때 발생하였다. 중종은 권력 강화를 위해 초야의 사림들을 중용하기 시작했으나 사림파의 권력이 급성장하자 이들을 내쳤다.

바로 조광조(趙光祖)와 우리고장 보은의 김정(金淨)으로 대표되는 기묘사화(1519)다. 이익(李瀷)은 ≪성호전집≫에서 이때의 장면을 '붓을 빼앗은 공'(奪筆公)이라는 글로 표현했다.

"참찬 채세영이 사국(史局)에 입사하였을 때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공이 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대궐에 달려가니, 당시 김근사(金謹思)가 가승지(假承旨)로서 죄안(罪案)을 고치려고 갑자기 공의 붓을 빼앗았다. 공은 급히 일어나 도로 빼앗아 와서 "이는 사관의 붓이니 다른 사람이 쓸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하고는, 이어서 상에게 아뢰기를 "신은 간관이 아니니 지위를 벗어나 논하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지금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원컨대 죄명을 듣고자 합니다." 하였다."-<성호전집 제8권>

인용문의 '이 사람'은 조광조를 일컫고 있다. 이익은 같은 ≪성호전집≫에서 채세영이 직필정신을 이렇게 칭송했다.

"왼손에 종이 잡고 오른손에 붓 잡고 / 붓끝에는 간인을 주벌할 예봉을 간직했네 / 엄연히 왕 앞에서 언동을 기록하니 / 지존도 감히 사심을 용납하지 못하네 /…/ 산벌레 나뭇잎 먹은 일 애매모호하니 / 악명과 선명은 무엇이 더 오래가는가 / 탈필공의 이름은 영원히 전해지리니 / 아아, 너희들 심적 부질없이 황망하구나."

인용문의 '산벌레 나뭇잎 먹은 일'은 훈구파가 '走肖爲王(주초위왕)', 즉 '조광조가 왕이 되려한다'는 나뭇잎글을 써 조광조를 무고한 것을 말한다.

◇ 사도세자 "내가 누구를 의지하란 말이냐"

임덕제(1722~1774)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아버지 영조가 친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사건이 이때 발생하였다. 이날의 부자갈등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한 사관이 바로 임덕제로, 그 상황이 《영조실록》에 매우 생생히 기록돼 있다.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세자가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영조실록 38년 윤5월 13일>

이날 영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11살 세손(후에 정조)이 들어와 관(冠)과 포(袍)를 벗고 엎드려 빌었으나 안아서 밖으로 내보냈고 나머지 대신들도 모두 물리쳤다. 그러나 땅을 붙잡고 버티며 이 장면을 기록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사관 임덕제였다.

"임금이 시위하는 군병을 시켜 춘방의 여러 신하들을 내쫓게 하였는데 한림(翰林·사관 지칭) 임덕제만이 굳게 엎드려서 떠나지 않으니, 임금이 엄교하기를, "세자를 폐하였는데, 어찌 사관이 있겠는가" 하고, 사람을 시켜 붙들어 내보내게 하니, 세자가 임덕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곡하면서 따라나오며 말하기를, "너 역시 나가버리면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란 말이냐"-<〃>

◇ 선조, 사관 사라지자 요동망명 계획

임진왜란 전의 조선왕조실록 사고는 충주읍성내 실록각(實錄閣)에도 보관돼 있었다. 3년마다 사관을 보내 포쇄(건조작업)를 하고 전주와 성주사고도 같다는 내용이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주목.

조선시대 사관들 모두가 춘추필법의 정론을 지킨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목숨 보전을 위해 사초를 불태우고 도망, 역사의 암흑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는 곡필을 넘어선 것으로, 실록 수정판이 만들어진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조선 선조대의 사관으로 조존세(趙存世) 등 4명이 있었다. 이들은 선조를 호종하던 중 왜군이 바짝 뒤쫓아오는 것을 느끼자 사초를 버리고 줄행랑을 쳤다.

"임진년에 서쪽으로 피란갈 때에 사관 조존세ㆍ박정현(朴鼎賢)ㆍ임취정(任就正)ㆍ김선여(金善餘) 등이 사기 초고를 불태우고 도주하였으므로, 정묘년에서 신묘년에 이르기까지 25년 동안의 사적(事蹟)은 깜깜하게 증거할 곳이 없게 되었다."-<상촌휘언(象村彙言)>

그 결과, "시정기(時政記·일종의 행정기록)는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나라에서 야사(野史)를 금하였으므로 사삿집에도 간수한 사고(史稿)가 없어서 20년 동안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정사를 증빙하여 적을 수 없었으니 애석하다"(지봉유설)라는 현상이 나타났다.

선조의 주변에 사관들이 없어지자 이상한 현상들이 나타났다. 선조는 자기를 따라붙는 사관들이 없음을 알고 분조(分朝), 즉 아들 광해군은 전화에 휩싸인 조선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왕비와 함께 중국 요동반도로 망명하는 것을 생각했다. 그는 호종하는 대신들에게 안남국(지금의 베트남)의 예를 들었다.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은 피난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안남국(安南國)이 멸망당하고 스스로 중국에 입조(入朝)하니 명조에게 병사를 동원하여 안남으로 보내 안남을 회복시킨 적이 있었다. 나도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하였기 때문에 요동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다."-<선조실록 25년 6월 13일>

/ 조혁연 객원대기자(충북대 사학과 초빙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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