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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종

전 청주시립예술단 사무국장

올해가 한국 교향악단이 시작 된지 꼭 90년이 되는 해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하지만 독일 드레스덴 슈타츠 카펠라는 창단 460주년이 넘었고,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는 245년이 넘었다.

아시아권에서는 우리나라와 일본이 그나마 근 100년에 가까운 교향악단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필자는 이번 기회에 한국 교향악단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독자들에게 우리나라의 서양음악 역사에 대한 이해를 돕고 지금의 한국 교향악단이 있기까지 음악을 사랑한 우리 선배들의 피땀 어린 노력을 상기해 보고자 한다.

한국 교향악단의 역사는 1926년부터 시작된다. 당시 선교사였던 부츠(Boots)여사와 피아니스트 박경호(朴慶浩), 이유경(李有慶)을 주축으로 '중앙악우회(中央樂友會)'가 창단됐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교향악단의 효시라 할 수 있다. 부츠 여사는 미국에서 정식으로 음악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당시 유일한 음악과가 있었던 이화여전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바이올린 이영세, 홍난파, 홍재유, 홍지유, 최호영, 곽정순 등 소위 경성에서 나름대로 서양악기를 다룰 수 있다는 사람 약 15명 정도가 여기에 동참 했다. 당시가 구한말(舊韓末) 조선의 정서가 남아있던 시기인지라 서양악기를 접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은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일반 사람들 보다 조금 쉽게 서양음악을 조금씩 접할 수 있었다. 또한 문화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던 대학생들을 비롯한 젊은 지식층에서 서양음악에 관심을 보였다.

중앙악우회는 매주 1회씩 경성 기독청년회관(현 YMCA)에서 정기적인 연습을 했다. 그들의 첫 창단 연주는 1928년 3월3일 400석 규모의 기독청년회관 강당에서 부츠 여사의 지휘로 무대에 올려졌다. 당시 레퍼토리는 슈베르트 '군대행진곡', 롯시니 '윌리암텔 서곡' 등이었다. 연주에 대한 녹음자료가 있지 않아 그들의 합주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코 쉽지 않은 롯시니의 서곡을 연주한 것으로 보아 중앙악우회의 실력은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이후 1930년 11월15일 조선일보 후원으로 연주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히 활동을 했으나 부츠 여사가 미국으로 돌아가고 박경호 마저 미국으로 유학을 가자 결국 해체됐다. 중앙악우회의 창단을 계기로 관현악단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1928년 '경성제국대학 관현악단'이 창단됐고, 1929년에는'연희전문 관현악단'이 창단됐다. 두 단체 모두 대학생들이 중심돼 시작한 순수 아마추어 관현악단으로 주로 학내를 중심으로 활동을 했다. 특히 경성제국대학 관현악단은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 교향악단으로서의 지금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오케스트라로까지 존속되고 있다.

연희전문 관현악단은 당시 성악을 전공하던 현제명이 중심이 돼 창단됐다. 일본 학생의 숫자가 많았던 경성제국대학 관현악단과는 달리 연희전문 관현악단은 한국 학생들이 주축이 됐다. 여기에서 활동한 김성태(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장), 이인범(테너, 전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장), 김생려(바이올린, 서울시립교향악단 초대 지휘자) 등이 나중에 한국 음악 발전에 주춧돌이 될 큰 거목이 됐다.

당시에는 호른, 바순, 튜바 등 특수 관악기를 전공하는 사람들이 아주 드물어 악기구성을 제대로 갖춰 연주하기가 쉽지 않았다. 바순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색소폰 연주자가 바순 파트를 대신 하는 경우도 있었고, 여분의 첼로 줄이 없어 가야금 줄을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환경과 조건은 그야말로 최악이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만큼은 무엇보다 뜨거웠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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