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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준

전 음성교육장·수필가

청주의 꽃다리를 지날 때마다 늘 궁금하게 생각해온 것은, 대부분의 큰 다리마다 꽃을 장식해서 아름답게 꾸미는데 왜 이 다리만 꽃다리라 부르게 되었는가? 언제부터 '꽃다리'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남다리'라는 속명은 남쪽에 있는 다리이니 그런 이름이 주민들에게 자연스럽게 불릴 수도 있다지만 역사 기록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꽃다리라는 이름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단순히 다리 난간에 꽃이 있어서 꽃다리일까? 90년대초에는 신설된 큰 다리 옆의 옛 다리에 꽃다리의 명성에 걸맞게 꽃동산을 만들기도 했던 것이다.

지금은 청주대교가 있고 아름다운 모양의 서문교, 흥덕대교 등이 청주의 대표적인 다리로 꼽히지만 옛날에는 남석교가 청주의 관문이 되는 큰 다리였다. 조선시대 남석교의 공식명칭이 대교(大橋)였으며 일명 남석교 또는 정진교(情盡橋)라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청주읍성의 남문이 청남문이었고 여기서 남쪽으로 쭉 뻗은 길에 연결되는 이 다리를 청남교라 했으며 지금도 꽃다리를 청남교(淸南橋)라 부르고 있다.

꽃다리

예로부터 정월 대보름 답교놀이 장소로 유명했던 남석교는 무심천의 옛 이름이 통일신라시대에 남석천, 고려시대에 석교천, 대교천 등 남석교의 이름에 따라 무심천의 이름이 정해지고 변해온 것을 보아 남석교의 규모나 중요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청주시 석교동 육거리시장 지하에 길이 80m, 높이 약 2m로 조선시대 이전의 돌다리로는 국내에서 가장 길다는 남석교가 100년 가까이 묻혀 있다. 1920년대 일제가 이 일대 물줄기를 메워 도로를 내는 과정에서 매몰함으로써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귀중한 문화유산이지만, 100년 가까이 햇빛을 보지 못하다 보니 문화재로도 등록돼 있지 않다.

청주읍성 남석교 복원 학술조사보고서(청주시·청주대박물관)에 의하면 남석교의 위치는 청주약국~육거리 시장 사이의 동명약국-구 석교동파출소 구간에 폭 4.7m, 길이 62∼80m로 아스팔트 노면 바로 밑에 누워있으며 인근 하수구 맨홀로 들어가면 남석교의 일부 멍에석, 장귀틀 등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신라 진흥왕 19년(558년)에 남석교를 수선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의 남석교가 그 당시에 축조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다만 조선 중종 25년(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석교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 적어도 1530년 이전에 건립된 오래된 돌다리임에는 틀림없다는 분석이다. 조선후기에 홍수 등으로 2차례 개축한 기록이 나타나며 1906년 대홍수로 무심천 유로 변경이 이뤄졌고 1932년 석교동 제방공사로 인해 기능을 완전히 상실해 매몰된 것으로 보인다.남석교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 온다

신라때 어린아이를 둔 젊은 과부가 시주를 하러 온 대원사(大元寺) 수행승(修行僧)에게 "스님 반 나절만 우리 애를 맡아주십시오. 남천을 건너 장을 봐야 하는데 아이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라며 부탁을 했다. 이에 수행승은 흔쾌히 허락한다. 그런데 수행승이 잠깐 낮잠을 자는 사이, 아이가 남천 외나무다리를 건너다 발을 헛디뎌 그만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이 광경을 목격한 아이의 어머니는 크게 슬퍼하며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대원사(大源寺) 주지(住持)는 가까운 고을에 있는 수행승들을 모두 동원해 웅장하고 견고한 돌다리를 가설해 주었는데 이 다리가 남석교라는 것이다.

그러면 위치를 바꾸어 새로 세운 청남교는 언제부터 꽃다리라고 불리게 된 것일까?

다리 난간에 꽃을 매달거나 꽃화분이 있다는 것으로 다리 이름으로 정하기는 어렵다고 본다면 아마도 새 다리를 만든 이후에 지어진 이름이 아니라 아주 옛날 남석교를 보면서 다리가 둑에서 돋아나와 둑을 연결한다는 의미로 보아 '곶(串)다리'로 불리다가 꽃의 고어인 곶과 음이 같아서 '꽃다리'로 주민들에게 구전되어온 속명이 아닐까하는 추측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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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