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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종

전 청주시립예술단 사무국장

올해 10월 세계 3대 음악 콩쿠르로 불리는 17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리 나라의 젊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우승을 하여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덕분에 한동안 국내에 쇼팽의 열풍이 불기도 하였다. 조성진이 녹음한 쇼팽 음반을 구입하기 위하여 새벽부터 음반숍 앞에 장사진을 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광경을 보면서 필자는 문득 상드가 생각났다. 사람들은 쇼팽(Frederick Chopin 1810~1849)은 잘 알지만 쇼팽의 6살 연상의 연인이었던 조르쥬 상드(George Sand 1804~1876)는 잘 모른다. 상드는 당시 프랑스 문단에서 잘 나가던 여류 작가였다. 쇼팽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었고 인기도 많았다. 상드는 자유분방하고 사랑이 넘치는 진취적인 여자였다. 새로운 사랑을 만나면 진심으로 그에 몰입했으며 열정적인 사랑을 바탕으로 자신의 글을 완성하였다.

조르쥬 상드는 16살 때 지방 귀족이었던 뒤드방 남작과 결혼했지만 틀에 박힌 시골생활에 만족을 못해 결국 이혼을 하고 아들 모리스와 딸 솔랑쥬와 함께 파리로 이주를 하였다. 상드는 이때부터 자신의 본명 '아망딘 오로르 뒤팽(Amandine Aurore Dupin)'을 버리고 작가 '조르쥬 상드'로 활약하게 된다. 상드는 이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활 방식도 완전히 바꿨다. 남장을 즐기고 시가를 피웠으며 남자들과 문학을 이야기 하고 혁명을 논하였다. 상드와 쇼팽은 1836년 11월 5일 리스트의 연인 마리 다구 백작부인이 개최한 파티에서 만난다. 당시 쇼팽은 이미 젊은 연주자와 작곡가로 주변에서 인정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상드는 병약해 보이는 26살의 청년 음악가에게 먼저 다가서지만 쇼팽은 남장을 하고 시가를 피우는 상드에게 거부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결국 집요한 상드의 애정 공세에 쇼팽은 굴복하고 만다.

사랑에 불이 붙은 그들은 아이들과 함께 스페인 마요르카 섬으로 밀월여행을 떠난다. 상드가 여행지를 마요르카로 정한 것은 나름 이유가 있었다. 마요르카의 따듯한 날씨가 쇼팽의 병을 호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는 마요르카의 축축한 날씨와 두 사람의 관계가 결혼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안 주변의 쌀쌀한 시선들로 인해 여지없이 무너지고 오히려 쇼팽의 병을 악화시켰다. 결국 그들은 마요르카 팔마를 떠나 발데모사의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쇼팽은 수도원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작곡에 몰두하여 그 유명한 '빗방울 전주곡'을 탄생시켰다. 불편한 수도원 생활을 견디지 못한 그들은 결국 파리로 되돌아 간다. 상드는 매년 여름 쇼팽을 자신의 고향인 노앙(Nohant)의 별장으로 데려가서 편히 쉬면서 작곡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 하였다. 쇼팽은 노앙에서 '화려한 폴로네이즈', '강아지 왈츠' 등의 명작을 탄생시켰다. 쇼팽의 건강이 날로 악화 되면서 둘 사이가 점점 멀어져 갔다. 상드가 소설 '루크레지아 플로리아니'를 발표하면서 둘은 사실상 10년이 연인관계를 정리한다.

상드와 헤어진 후 쇼팽은 1848년 4월 아픈 몸을 이끌고 영국 연주여행을 강행한다. 쇠약해진 쇼팽은 연말에 파리로 돌아와 이듬해 그르지말라 백작과 그의 여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주변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상드는 임종 순간까지 나타나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그의 손을 잡아 준 사람은 상드의 딸 솔롱쥬였다. 그가 죽고 난 후 그의 유품 속에서 봉투 하나가 발견되었다. 겉봉에는 상드와 쇼팽의 이니셜인 G.F가 쓰여 있었고 봉투 안에는 상드의 머리카락 한 묶음이 들어 있었다. 상드와 헤어진 후에도 쇼팽은 상드를 한시라도 잊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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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