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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 대통령과 충북

이춘구, 이원종 등 도내 유력 정치인 다수 발탁
대통령 재임시 충북 10번 방문, 자화전자 포함
1994년 청주 남일초도 방문, 충북과 깊은 인연

  • 웹출고시간2015.11.22 19:00:50
  • 최종수정2015.11.22 19:55:40

김영삼 전 대통령이 향년 88세의 나이로 서거한 22일 청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시민들이 관련 뉴스특보를 보고 있다.

ⓒ 김태훈기자
[충북일보] 1987년 5월과 6월 청주시내 하늘은 뿌연 최루액으로 덮혔다.

군사독재 퇴진을 주장하던 청주대·충북대·서원대 학생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청주시내 곳곳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각 학교에서 출정식을 가진 대학생들은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 남궁병원 앞 도로에 집결해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독재에 항거했다.

이들은 1980년 9월부터 1981년까지 제11대 대통령을 역임한데 이어 1981년부터 1988년 2월까지 12대 대통령으로 재직한 전두환 군사독재를 몰아내고 국민이 직접 뽑는 대통령 선거 직선제 쟁취를 외쳤다.

급기야 당시 집권당인 민정당 대표였던 노태우 대통령 후보는 1987년 6월 29일 국민들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요구를 수용했다.

이를 6·29 선언이라고 한다. 당시 대학생과 화이트컬러층의 격렬한 시위는 현재까지 '6월 항쟁'으로 불리고 있다.

국민들은 잠시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독재를 몰아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하지만, 민주화 과정에서 동반자였던 김영삼과 김대중이 서로 반목(反目)했고, 동시에 김종필도 대통령 후보에 출마했다.
1989년 12월 치러진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1위는 828만2천738표(득표율 36.6%)를 차지한 노태우 후보의 당선이었다.

이어 김영삼 후보가 633만7천581표(득표율 28%)로 2위, 김대중 후보 611만3천375표(득표율 27%)로 3위, 김종필 후보 182만3천67표(득표율 8%)로 4위를 각각 기록했다.

'6월 항쟁'으로 쟁취된 사상 첫 직선제 투표에서 야권은 분열했고, 분열의 중심에는 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 이른바 '3김(金)'이 있었다.

13대 노태우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대학생들의 시위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군사독재 시절 최대 금기어였던 남북통일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당시 수세에 몰렸던 김영삼·김대중·김종필은 대권을 차지하기 위한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 1990년 1월 22일 당시 집권여당인 민정당과 민주당, 공화당이 '3당 합당'을 선언했다. 이를 통해 통합 민주자유당이 출범했다.
김영삼은 '3당 합당'을 주도해 1992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42%의 지지율로 14대 대통령에 당선됐고, '3당 합당'을 야합이라고 주장했던 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33.8%의 득표에 그쳐 낙선했다.

김영삼은 당시 충북에서도 득표율 38.3%로 1위를 차지했다. 김영삼은 재임 5년 동안 충북을 10번 방문했다.

재임기간 7년 5개월인 전두환 전 대통령의 24차례 방문과 노태우 전 대통령 15차례, 김대중 전 대통령 11차례 등에 이어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10차례 방문한 기록이 지난 2012년 '충북 민속문화의 해'를 맞아 충북도가 조사한 '역대 왕들의 충북 나들이 기초조사'에 남아 있다.

김영삼은 대통령 별장 청남대를 가장 사랑한 대통령으로 기록되고 있다. 임기 5년 내내 여름휴가를 청남대에서 보냈다.

특히 김영삼은 1993년 8월 우리나라 금융업에 지각변동을 불러온 '금융실명제 실시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을 청남대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1994년 2월 15일 김영삼은 청주 남일초등학교를 방문했다. 이 같은 사실은 현재 남일초등학교의 학교연혁에도 실려 있다.
김영삼은 1997년 5월 20일 중소 전자업체인 충북 청원군 자화전자를 방문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자화전자 임직원들과 구내식당에서 오찬을 함께하고 TV·컴퓨터 모니터용 전자선 접속장치, 반도체 소자를 만드는 공정과정을 지켜보았다.

김영삼은 충북에서 이춘구 전 신한국당 대표와 이원종 현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장(민선2~3기 충북도지사)를 발탁하기도 했다.

충북 청원 출신의 이 전 대표는 11∼14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4선 의원으로 5·6공화국을 거치면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집권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당선에 크게 기여한 한국 정치현대사의 한 증인이다.

이 전 대표는 신군부 출신임에도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당선시키는데 기여했고, 1994년 국회 부의장 자리까지 올랐다.

이후 1995년 민주자유당 대표와 1996년 신한국당 대표 등을 맡아 김영삼 정부에서 핵심적인 정치인사로 활동했다.

김영삼은 1993년 3월 8일 인사파문을 수습하기 위해 법무와 건설, 보사 등 3부장관을 경질하고 공석중인 서울시장 등을 새로 임명했다.

당시 임명직 서울시장에는 충북 제천 출신의 이원종 전 충북지사가 발탁됐다. 김영삼은 이원종 시장에게 "지방화 시대에 맞게 수도권 기능 분산이 절실하다"고 지적하고 "특히 교통난과 환경오염 그리고 인구 과밀화에 따른 범죄 증가 등에 대해 기본 대책을 강구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충북 출신의 이춘구 전 대표, 이원종 전 지사와 함께 현재 국내 정치권에서는 상도동계 출신의 정의화 국회의장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서청원·이인제 새누리당 최고위원 등이 포진한 상태다.

김영삼은 우리나라 최초의 문민정부 시대를 개막한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대한민국 최초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신청(1997년 11월 22일)한 원인을 초래했다는 부정적 평가도 적지 않다.

공교롭게도 1997년 11월 22일 IMF의 수모를 겪은 1997년 11월 22일 이후 18년 만인 2015년 11월 22일 김영삼은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뒤로 하고 영원히 잠들었다.

서울 / 김동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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