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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학교역사가 말한다 - 청주 문의초등학교

마을 축제 같은 '운동회'… 북경쟁·럭비·걸교·체조 등 즐겨
1909년 8월 사립 영명학교로 개교… 류영기씨가 설립
충주댐 수몰로 1984년 현재 자리 이전… "민족 역사 기억해주길"

  • 웹출고시간2015.10.29 18:53:08
  • 최종수정2015.10.29 18:53:08

문의초등학교 전경

[충북일보] 대청댐의 준공으로 가옥과 농경지가 수몰돼 학교를 이전하는 등 어려운 시기를 극복한 청주 문의초등학교(교장 우영숙)는 교육 1세기라는 위업을 세우고 지금도 비상하고 있다.

1907년 11월 전 한국 학부령에 의해 창립인가를 획득한 문의초는 1909년 3월 16일 사립문흥학교로 개교했다.

문의초등학교의 100년사의 기록에 보면 1909년 충북에 세워진 학교는 공립보통학교 3개교, 사립학교 46개교, 일본인 설립 3개교가 있었다.

문의초등학교의 전신인 문흥학교의 소재지는 문의군 읍내면 상동으로 돼 있다. 설립자는 이의재, 교장은 조인식이었고 학과목은 실업과 보통과 일어과가 있었고 수업연한은 4년, 교원은 2명, 학생은 49명, 예산은 69만4천300원으로 돼 있다.

문흥학교는 도내 다른 사립학교보다 일찍 문을 열고 향청을 사용했다. 당시 향청을 사용했던 학교는 청주군 보성학교, 옥천문 창명학교, 황간군 공립보통학교, 단양군 익명학교, 청풍군 영명학교 등이다, 향청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들 학교가 공립학교의 성격을 갖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 문의초등학교의 설립

문의초 개교 100주년 상징탑

1909년 당시 문의군에 소재해 있던 사립학교는 문의군 동면 지촌의 문동학교, 문의군 삼도면 구평의 의성학교, 문의군 일도면 중덕리의 화영학교, 문의군 읍내면 문흥학교가 있었다.

이들 살립학교의 소재지를 보면 현재의 문의면 지역에서 벗어나 있는 곳이 많다.

동면과 삼도면, 서일도면은 현재의 문의면에 속하지 않는 지역으로 읍내면이 현재의 문의면에 속한다. 결국 문흥학교가 문의초등학교의 전신으로 보고 있다.

# 문의초등학교의 변천

1912년 4월1일 문흥학교가 문의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한 것은 문의초의 첫 번째 전환점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후 1938년 문의공립심상소학교, 1941년 문의공립초등학교, 1949년 문의국민학교로 변경됐다.

1980년 대청댐의 완공으로 문의초는 수몰의 아픔을 겪었고 학교는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이후 문의초 학군에 속했던 마을들이 상당부분 수몰되면서 주민들이 타 지역으로 이주해 학생수가 급격하게 감소했다.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문의면 문산리와 덕유리, 가호리 지역이 수몰되고 나머지 마을도 일부가 수몰되는 운명을 맞았다.

당시 법정리 18개중 66.6%에 해당하는 12개 리와 73개 마을의 47.9%인 35개 마을이 수몰됐다. 수몰면적은 전체 7천679ha의 21%인 1천633ha였고 수몰가구수는 2천291호의 44%인 1천31가구, 인구는 1만2천786묭중 57%인 7천385명이 이주했다.

이처럼 대청댐 건설로 많은 주민들이 고향을 떠나 타향으로 대이동을 하게됐다. 그 결과 문의초 학생수는 급격하게 감소됐다.

# 일제시대의 학교생활

1942년(제29회) 당시의 아침 조회 장면

1940년대 문의초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시험을 치렀다. 줄을 거서 차례로 기다리면서 교사가 질문하면 일본말로 이름과 나이, 출신지, 부모이름 등을 해야만 입학이 가능했었다.

학교에서는 군대식으로 조회때 줄을 맞추어 서고 반장이 앞에서 지휘하고 일본인 교장의 훈화를 들었다.

문의초 졸업생은 1913년 1회 졸업생이 8명, 2회가 12명, 3회 25명, 4회12명, 5회 13명, 6회 21명, 7회 19명 등이었다. 해방전 가장많은 졸업생을 배출한 것은 1943년으로 145명의 학생이 졸업했다. 이후 대청댐이 들어선 1980년에는 150명이었다가 1981년부터 학생수가 급감해 90명이 졸업을 했다.

# 교명의 변경

제3차 조선교육령 개정에 따라 문의초등학교는 1938년 4월 문의공립보통학교에서 문의공립심상소학교로 변경됐다. 이어 1941년 3월 칙령 148호 초등학교 규정에 따라 4월1일 문의공립국민학교로 교명을 바꿨다.

1942년 문의초 학생들이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다.

3년만에 교명이 두차례나 변경됐지만 학교의 변화의 거의 없었다. 이후 4년4개월만인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게되고 3년후인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하게 됐다.

학급수로 볼 때 1938년 8학급에서 1947년 16학급으로 매년 1학급씩 증가했다. 이러한 추세로 볼 때 1943년 13학급이 되거나 1944년 14학급이 되어야 했으나 실제로는 1학급씩 부복한 것으로 나타났다.

부족한 원인은 태평양전쟁 등에 전념하느라 일제가 교육분야에 투자를 줄인 결과인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해방직전 극도로 어려운 시기에도 학급수가 감소하지 않은 것은 일제가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이 시절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는 1939년 4월 이전부터 시행돼 오던 특과를 폐지하고 2부를 둔 점이다. 1939년 1학급, 1940년에 2학급을 운영했다.

1941년 5월에는 문의공립보통학교 부설 도원간이 학교가 건립돼 7월1일 개교했다.

1945년 8월 15일 임시휴교에 들어갔던 공립국민학교가 다시 개교 한 것은 1945년 9월17일 이었고 초등학교 의무교육이 실시된 것은 1950년 6월1일 이었다. 초등학교 취학률은 일제말기에 54%, 1960년에는 95.3%, 1977년 97.6%로 증가했다.

우영숙 교장은 "문의초등학교 역사는 우리나라 학교의 역사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며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문의초가 이만큼 성장하게 된 것은 동문들과 지역민들의 아낌없는 지원이 한 몫을 했다. 문의초가 명문학교가 되도록 전 교직원이 힘쓰겠다"고 말했다.

/김병학·성홍규기자

<인터뷰 > 문의초 졸업생 송병성씨

해방당시 문의초등학교 4학년 이었던 송병성(82)씨는 일본인의 악랄함에 치를 떨었다.

"겨울에 양지바른 곳에서 햇볕을 쬐고 있을 때 일본인 교사가 줄넘기로 얼굴을 때리고 웃던 모습은 지금도 잊어버리지 못하고 있다"며 "일본인 교사는 제자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보다 제자를 노예나 노리개로 생각했던 것 같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송 옹은 "나는 해방당시 초등학교 4학년 이었다. 초등학교 입학시 시험을 봐서 합격해야만 입학이 가능했다"며 "아버지가 시험보기 전 나이와 이름, 주소 등을 일본말로 가르쳐 면접에서 합격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일제시대때 문의초등학교는 체육공원 아래에 있었다. 지금은 수몰로 터를 찾아 볼 수 가 없지만 추억은 간직하고 있다"며 "나는 해방되기 전까지 일본말이 우리말인줄 알았다. 한글이 있는 줄을 몰랐다"고 말했다.

이어 "일제시대때 학교 운동장에 다니는 길만 남겨두고 고구마와 토마토 등을 심었던 기억이 난다"며 "나는 당시 고구마를 처음봤다. 고구마를 심어놓고 일본인들은 해방이 되자 캐지도 못하고 모두 도망갔던 기억이 난다"고 덧붙였다.

또 "봄철에는 학교 등교할 때 쑥을 뜯어오라고 해 쑥으로 죽을 쑤어서 점심을 주기도 했다"며 "추운 겨울에 홑겹으로 된 옷을 입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모든 것을 일본인들이 모두 빼앗아 가고 겨울에는 개다를 신고 다녔다. 눈이 오면 눈이 바닥에 붙어 털고 다니기도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일본인들이 한국인을 노예처럼 부렸던 기억도 더듬었다.

그는 "학교 다닐 때 학생 1인당 가마니를 50매씩 배정을 해 학교에 가져갔던 기억도 있다. 가마니는 모두 수거해 일본인들이 전쟁에 사용했던 것 같다"며 이어 "싸리나무 껍질과 송진(광솔)을 모아 오라고 시켰던 기억도 있다. 송진을 학교에 가져가면 기술자들이 송진으로 기름을 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설명했다.

송옹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전라도에서 문의를 오가던 방울장수 아주머니가 있었다. 그분이 우리집에서 묵어가면서 하소연 하면서 하시던 말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며 "밭에 점심을 해서 가지고 갈 때 어린딸이 주전자에 물을 떠서 뒤를 따라 올 때 일본인 순사가 딸을 잡아가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며 울면서 하소연 하던 생각이 난다"고 어린소녀들까지 위안부로 끌려간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 "일본은 한국인들을 이렇게 고생시켜놓고 지금도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다.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해방후 한국인 선생님이 이제는 한글을 배워야 한다며 '기역 니은'을 가르쳤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두 '한글 첫걸음'이라는 책을 다같이 배웠다"며 "당시 학교에서 나눠준 한글첫걸음 이라는 책을 지금도 가보로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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