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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중국의 문방사우 - 중국의 붓

中 황산서 6대째 붓 만드는 대가 양문씨
휘필 제작시 72가지 절차… 1만개의 털에서 붓 하나
붓 개조 등 역사 속에 글씨 쓰는 도구 다양하게 존재

  • 웹출고시간2015.10.29 18:50:01
  • 최종수정2015.11.12 19:00:00

양문씨가 운영 중인 붓 공방

ⓒ 김태훈기자
[충북일보] 중국의 선필은 안휘성 경현(涇縣) 청과강(靑戈江) 상류지역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2천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토끼털로 만든 붓은 진필(秦筆)이라고 불리우고 있으며 지금은 이것을 붓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송나라때 붓을 만드는 기술이 더욱 발전하여 붓대에 글이나 다른 내용물을 조각해 올려 또 예술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금은 북경, 상해 등 문방구에 공급되며 매년 일본, 동남아, 구라파 등 지역에 10만대 정도 수출된다.

선필은 토끼모, 양모, 쪽제비모, 등을 주요 원료로 하여 붓 한대를 만드는데 한사람이 한손으로 일조일석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종류로는 260여개종류가 되며 그중에서 선주자호와 순자첨호가 유명하다.

# 휘필의 대가 양문

중국 황산 휘필의 대가인 양문씨(사진 왼쪽)

ⓒ 김태훈기자
중국 황산에서 6대째 붓을 만들어 오고 있는 휘필의 대가인 양문(47)씨를 찾아 중국의 붓에 대한 설명을 들어본다.

양씨가 말하는 휘필의 역사는 남송시기때부터다.

양씨는 "붓은 오래 보존하기 힘들고 또한 휘필은 공품으로 많이 사용해 거의 황궁안에만 보관됐다고 한다"며 "휘필이 황궁에서만 사용해 오면서 민간에 전해지는 양은 많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휘필에 대한 설명으로 "휘필은 필두와 연필대 2가지로 나누어진다"며 "필두를 제작하는데 72가지 제작절차가 소요되고 1만개의 털에서 붓 하나가 나온다"고 말했다.

양씨는 휘필두를 만드는데 아주 세심한 공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붓의 재료로는 주로 산토끼털이나 족제비털, 산양털, 승냥이털 등 200여가지의 털로 제작을 한다고 한다.

연필대는 주로 수공으로 하는데 참대나 나무 또는 상아, 소뿌리 등을 재룔로 사용한다. 양씨가 만든 붓은 외관이 아름다운데다 실용적이어서 중국에서도 인기가 높다고 설명하고 있다.

# 중국 붓의 역사

양씨가 들려주는 중국의 붓의 역사는 서기전 22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진나라 장군 몽념이 병마를 거르리고 산중에서 초나라와 전쟁을 하고 있었다.

쌍방은 매우 격렬하게 싸웠고 전쟁은 장시간 계속됐다. 진나라왕에게 수시로 전쟁 상황을 자세히 알리기 위해 몽념은 정기적으로 전쟁상황을 진왕에게 써서 보냈다.

양문(오른쪽)씨가 붓 제작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다.

ⓒ 김태훈기자
그때 사람은 보통 가는 막대기에 먹을 찍어서 실로 짠 비단위에 글자를 써 글씨 쓰는 속도가 매우 느렸다. 이를 지켜본 몽념은 비록 무장이었지만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

막대기 붓으로 전쟁 상황을 기록할 때 그는 딱딱한데다 먹물도 잘 스며들지 않아 글자를 몇 글짜 못쓰는 것을 바라보고 아이디어를 냈다.

그가 지켜본 막대기 붓은 딱딱한데다 먹물도 잘 찍혀지지 않아 글자를 몇 자 못쓰고 다시 멈추는 작업을 계속했다. 먹물을 많이 묻히면 곧 아래로 떨어져 버렸고, 그 바람에 귀중한 비단이 더뤄워지기 일쑤였다.

몽념은 이전에 붓을 개조하려고 시도한적이 있었다.

전쟁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는 마음이 들었던 그는 여러 가지 연구를 해왔다.

양문씨가 운영하는 공방에 진열된 붓들

ⓒ 김태훈기자
어느날 야외로 나가 사냥을 하면서 몇 마리 토끼를 잡아 진영으로 돌아왔다. 잡은 토끼가 많아 손에 들고 가기가 약간 무거웠고, 그 가운데 한 마리 토끼 꼬리가 빠져 땅바닥에 떨어졌다. 피가 땅바닥에 흘리며 구불구불한 흔적을 드러냈다. 이를 본 몽념은 순간 한가지 영감이 떠올랐다.

'만약 토끼 꼬리로 보통 붓을 대신해 사용한다면 더욱 좋지 않을까' 진영 막사로 돌아온 후 몽념은 즉시 가위로 토끼 꼬리를 잘랐고, 그것을 대나무 고나에 끼워서 시험적으로 글씨를 썼다. 그러나 토끼 꼬리에 기름기가 많아 먹물이 흡수되지 않아, 비단위에 쓰여진 글씨는 끊어졌다 계속되다 하여 글씨 모양이 나오지 않았다.

몽념은 여러차례 시도를 했으나 잘 안되었고, 비단도 낭비되었다. 화가 난 그는 그 토끼털로 만든 붓을 앞에 있는 산속 굴속에 던져버렸다.

그후 몽념은 결코 실패를 발판으로 시간 있을 때 마다 다른 방법으로 붓을 개조하려는 시도를 했다. 몇일이 지나도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던 어느날 그는 산속 진영 막사를 떠난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그래서 그 산속굴 앞을 지나다가 그가 버렸던 토끼털붓을 보게 되었다.

몽념은 그 붓을 주워들고, 손가락을 토끼털 붓을 꿀 눌렀다. 그러자 털속에 물기가 가득한 것을 발견했다. 털색깔도 더욱 하얗고 부드럽게 변해있었다.

몽념은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 곧 진영 막사로 돌아와서 그 토끼털붓에 먹물을 묻혀 보았다.토끼털은 이때 매우 사용하기 좋게 변해 있었고, 먹물을 잘 흡수했고 글씨도 매우 잘 쓰여졌다. 글씨체도 골고루 잘 쓰여졌다. 그 산속굴속 물에는 석탄질을 함유하고 있어서 토끼털이 부드럽게 변해있었던 것이다.

그 붓은 대나무 관에 토끼털을 끼워넣은 것이었다. 몽념은 당시 유행하던 붓 이름인 '행(幸)'자 위에다 대나무 죽자를 더해서, 그 붓을 분이라 불렀다. 오늘날은 간단하게 '필'이라 부른다.

양씨는 "최초의 붓은 갑골문에 그려 진 그림을 그린 붓으로 붓을 사용해 쓴 글자는 죽간이나 비단위에 글씨를 쓴 것으로 중국에서는 보고 있다"고 말했다.

양문(왼쪽)씨가 붓 제작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다.

ⓒ 김태훈기자
양씨는 이와함께 다음과 같은 말도 곁들였다.

사실상 붓의 발명권은 전적으로 몽념 한 사람에게 돌릴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1954년 호남성 장사 좌가공산의 한 무덤에서 완전한 글씨쓰는 도구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몽념이전에도 이미 소위 붓이라 할 수 있는 도구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춘추전국 시대 제후들을 웅(雄)이라고 불렀는데 이때 각국은 붓에 대한 호칭이 모두 달랐다. 오나라 즉 오늘날 강소성 일대에서는 불률이라 불렀고 연나라 즉 오늘날 호북성 일대에서는 죽이라 했다. 이후 진시황이 통일 후에 일률적으로 모필 즉 붓이라 부르게 했다.

양문씨가 운영 중인 공방에 붓을 구입하려는 구매자들이 줄을 잇고 있다.

ⓒ 김태훈
수개황 9년부터 붓을 선필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당나라 시인 이백,백거이 등 명인들은 선필을 찬송한 시도 많이 남겼다.

동진때 서예가 왕희지는 선필을 얻기 위해 구필첩을 써서 선필의 소중함을 표현했다.

송나라때 붓을 만드는 기술이 더욱 발전하여 붓대에 글이나 다른 내용물을 조각해 올려 또 일종 예술품으로 변화했다.

양씨가 제작한 선필을 현재 북경의 '송보재(宋寶齋), 상해의 타운헌(朶雲軒) 등 문방구에 공급되고 매년 일본, 동남아, 유럽에 10만대 정도 수출되고 있다.

양씨는 "선필은 토끼모나 양모, 쪽제비모 등을 주요 원료로 해 붓 한대를 만드는데 한사람이 한손으로 하루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종류로는 260여가지가 되며 그 중에서 '선주자호(宣州紫毫)'와 '자첨호(紫尖毫)'가 유명하다"고 말했다.

양씨가 말하는 붓의 종류는 대단히 많다. 일반적으로 글씨를 쓰는 붓은 대략 연성, 경성, 중성 등 세 종류로 나눈다.

연성필에는 양호필 계호필 등이 있고, 경성필에는 자호와 낭호, 서호가 있다. 또 중성필은 겸호라고도 불리우고 있는데 양자겸필과 양낭겸필 등 두 종류가 있다.

양씨는 붓의 성질에 대해 "경호필은 붓의 성질이 강건하고, 연호필은 붓의 성질이 부드럽고 연하다"며 "겸호필은 경호와 연호를 함꼐 사용해 만든 것으로 강함과 부드러움이 함께 있다"고 설명했다.

/김병학.김태훈기자
이 기획물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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