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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5.09.24 17:11:33
  • 최종수정2015.09.24 17:11:33

조혁연 대기자

[충북일보] 1728년(영조 4)의 이인좌와 1755년(영조 31)의 유수원 역모사건은 30년 가까운 시간차가 나고 있으나 그 뿌리는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노론대 비노론의 정치적 대결이었다. 이때의 비노론은 소론과 남인들의 정치적인 연합을 의미하고 있다.

지난 회를 끝으로 영조 연간을 휩쓸었던 두 정치적인 사건을 성깃성깃 하게 살펴봤다. 그 와중에 엄벙둠벙 하면서 빼먹은 인물이 있다. 황진기(黃鎭紀)라는 인물이다.

그는 1728년(영조 4) 선전관(宣傳官)이라는 중앙정부의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그해 발생한 이인좌의 난에 가담했다. 선전관은 국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무반직으로 종9~정3품의 품계를 지녔으나, 그가 어느 단계에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그가 김일경(金一鏡·1662∼1724)의 문인(제자)으로 추정되는 만큼 골수 소론계 인물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이명언(李明彦) 부자와 함께 밀서(密書)를 꿰맨 호복(胡服)을 입고 역모를 도모하였는데,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면서 청나라로 망명했다.

흔치 아닌 망명사건이 발생하면서 영조 정부는 바짝 긴장했다. 당시 조정은 망명한 황진기(黃鎭紀)가 처벌된 무리와 연락, 후에 다시 2차 역모를 일으키는 경우를 가장 우려했다.

'황진기 아들 (황)영이 물고(처형)됐다'는 표현이 보인다.'영조실록' 28년 11월 9일자

"역적 황진기가 피중(彼中)에 가 있는 것이 의심할 바 없이 명백합니다. (…) 대개 저 호인(胡人)이 있는 곳은 우리 국경과 거리가 5리나 10리에 지나지 않으므로 우리 나라에서 죄를 지은 무뢰한들이 모두 찾아가서 변경 사람이 죄다 그의 심복과 이목이 되니, 명나라 말기의 간세배(奸細輩)들의 작폐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영조실록 9년 9월 22일자>

그러나 영조정부의 애면글면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내외 어느 곳에서도 황진기의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사건 진척이 없자 당시 조정은 황진기의 가족에게도 고문을 가했다.

'망명적(亡命賊) 황진기(黃鎭起)의 어미와 처(妻)를 잡아왔는데, 포청(捕廳)에 명하여 황진기의 간 곳을 엄문(嚴問)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영조실록 9년 6월 1일자>

<영조실록> 11년 10월 9일자에는 이런 기사도 실려 있다.

"이명언(李明彦) 부자의 이름이 함께 여러 역적들의 공초(供招)에 나왔었는데, '호복(胡服)으로 거사한다.'라는 말과 옷 속에 밀서(密書)를 넣어 꿰맨 일은 그 흉악하기가 지극하였으며, 더구나 그는 망명(亡命)한 역적 황진기(黃鎭紀)와 더불어 친족 관계가 됩니다."

이 기사는 1728년 이인좌의 난 당시가 아닌,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석신(李碩臣)이라는 신하가 간언하는 내용이다. 이는 황진기 망명사건이 그때까지 종료되지 않았음을 의미하고 있다.

실제 1748년(영조 24) 청주에서 발생한 이지서 역모사건에는 "이지서가 항상 말하기를, '울릉도 건너편에 황진기 등 무신년의 여당이 있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황진기가 죽지 않았으면 반드시 나올 것이다.' 했기 때문에…"(5월 23일자)라는 진술이 나오기도 했다.

영조 정부는 이인좌의 난이 발생한지 30년이 돼가자 황진기를 체포하는 노력을 포기했다. 대신 후환을 우려해 이인좌의 난 직후부터 옥에 갖여 있었던 황진기의 아들을 전격 처형했다.

'포도청에 현재 갇혀 있는 죄인 황진기(黃鎭紀)의 아들 황영(黃英)이 물고되었다.'-<영조실록 28년 11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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