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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학교역사가 말한다 - 단양 단양초등학교 - 충북과 나의 연결고리 '충북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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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학교역사가 말한다 - 단양 단양초등학교

1909년 2월 익명학교로 개교… 교사 2명·학생 56명 재학
충주댐 건설 후 수몰… 남한강 흐르는 신단양으로 이주
졸업생 1만2천명 배출… 지역사회 발전 디딤돌 역할

  • 웹출고시간2015.10.01 19:38:36
  • 최종수정2015.10.01 19:38:36
[충북일보] ◇ 이름도 없는 학교의 시작

1950년대 단양초 교사 전경

단양초등학교는 처음 단양군 읍내면 상방리에 1909년 2월 3일 사립 익명(益名)학교로 2명의 교원이 7년 수업 과정으로 56명이 입학해 보통과와 일어법제, 경제를 가르치며 시작했다.

이어 같은 해 8월 16일 인가를 얻어 장사국(張思國)이 교장이자 설립자로 등록됐다.

이 사립 익명학교는 1910년 3월 3일 단양공립 보통학교로 전환 인가돼 1913년 3월 25일 드디어 제1회 졸업생(4년제)를 배출했다.

이후 단양공립 보통학교는 1면 1교 설립 정책에 따라 1938년 3월 조선교육령이 선포되며 같은 해 4월 1일 단양공립 심상 소학교로 개칭되고 조선어 교육이 폐지됐다.

이어 1941년 초등학교령이 발표되면서 단양공립 심상 소학교는 그해 4월 1일 단양공립 초등학교로 개칭됐으며 1945년 일제가 폐망하고 광복되며 1945년 9월 24일 단양공립 국등학교로 개교되기에 이르렀다.

1945년 5학년 1반의 단양 하선암으로의 소풍

단양공립 초등학교는 1949년 2월 1일에 단양국민학교로 명명되며 최근까지 이 명칭을 사용해 오다 1996년 3월 1일 현재의 명칭인 단양초등학교로 교명이 확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단양 사립 익명학교는 영춘의 홍명학교와 같은 시기에 공립보통학교로 전환돼 현재의 단양초등학교로 이어져오고 있다.

◇ 일제강점기의 학교와 학생들의 생활

1920~30년대에 단양공립 보통학교는 현 단성면 하방리 단양천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학교 앞으로는 두악산이 우뚝 솟아 있고 뒤로는 소금배가 오른내리는 유명한 남한강이 도도히 흐르는 산자수려한 위치였다.

학생수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두 합해도 200여명이 되지 않았으며 남녀학생의 비율은 8대2로 남학생이 훨씬 많았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남학생 중에는 기혼자로 상투를 틀고 등교하는 학생들이 있었으나 입학 이후에는 일제에 의해 삭발을 해야 했다.

따라서 학생들의 나이차는 컸으며 나이 많은 학생들은 1학년에서 3학년으로, 3학년에서 5학년으로 월반하는 경우도 제법 많았다.

1940년대 입학식 사진(30회)

또 하나 특이한 점은 근래의 '현장체험학습'처럼 도시학생들이 농촌을 찾아 농사일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교육이 있었다.

당시 단양 보통학교의 학생들은 학교실습지가 학교에 있어 방과후 각가 자기담당 실습지에서 토마토 등의 각종 채소를 경쟁적으로 키워 시장에 내다 팔았다.

학생들은 수입도 수입이지만 어려서부터 배운 농사경험을 토대로 평생 활용하며 삶을 꾸려나갔던 것이다.

현재는 화학비료가 대부분이지만 당시에는 비료로는 대부분 인분이었기에 항상 학생들의 의복과 몸에서는 인분냄새가 진동했으며 밭에 가도 같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 광복이후와 6.25 그리고 현재까지

47회 연극반원이 대회에 나가서 1등을 했다.

단양초등학교는 6.25 당시 폭격과 그 후 화재 등으로 인해 졸업생 명단이나 역사적 학술적 문화적 자료가 유실돼 전무했다.

1945년 광복이 되며 일제가 물러났으나 교육 환경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이어 6.25 전쟁으로 인한 폭격으로 교사가 파손되는 등 열악한 환경이 지속되며 학생들의 수업여건은 좋아 질 수가 없었다.

여기에 1960년대에 발생한 화재로 인해 교사가 전소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학생들에 대한 교육을 이어왔다.

이후 1985년 근대에 접어들며 충주댐이 건설됨에 따라 옛교사사 있던 지역이 수몰되며 현재의 신단양으로 이주를 하게 된다.

특히 눈길을 끌만한 점은 1950년대 전쟁이 끝난 이후의 학교생활은 학생들의 교육보다 부수적인 일들로 교사와 학생들이 바빴다는 점이다.

1950년대 단양초 운동회 모습

1957년 졸업한 학생들은 학교 교사에 120본의 감나무를 심었으며 당시 교장은 이 감나무를 훌륭하게 키우라며 항상 학생들에게 훈시를 했다고 한다.

이 특색 사업의 1호 책임관리자로 당시 5학년 남자반과 담임교사가 선정됐으며 관리에는 넓은 공터의 감나무를 표시하고 일련번호로 관리번호가 부여되고 학년초 사무인수인계 시 감나무의 키를 감나무 대장에 몇㎝까지 기재해야 했다고 한다.

이 같은 여건에서도 단양초는 거친 물결을 헤쳐오며 그동안 1만2천명이라는 인재를 배출하며 국가와 지역사회의 발전에 중요한 디딤돌 역할을 훌륭하게 해 왔다.

마디마다 굵게 패인 상처가 매우 깊지만 지난 100여년은 훌륭한 선배들의 희생적인 애교심으로 학교 발전의 숭고한 정신이 꽃을 피운 찬란하고 영광된 나날로 기억되고 있다.

◇ 앞으로의 100년을 준비하는 단양초

현재의 단양초등학교 전경

지난 2월 제103회 졸업식을 치른 단양초는 현재 1~6학년까지 특수학급을 포함해 모두 16학급으로 편성돼 있다.

전체 학생수는 351명으로 이중 남학생이 183명, 여학생이 168명으로 구성됐으며 전병우 교장과 전영봉 교감을 비롯한 27명의 교사와 교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다.

현재의 단양초의 학부모들은 작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자녀교육과 학교 교육에의 열의가 상당히 높아 학생들의 학력향상에 매우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학교는 기초학력의 토대위에 자기주도 학습능력을 배양하고 특기 적성을 계발시키는 교육에 중점을 두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에 따라 학교는 기초학력 확보를 위한 대책수립과 운영은 기본으로 바른 인성 함양과 방과후 학교 활성화를 위해 노력중이다.

단양초가 추구하는 어린이 상은 슬기롭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며 미래의 꿈을 키우는 어린이다.

학교는 교육과정 중심의 자율경영으로 새롭게 앞서가고 교사는 전문인으로서의 부단한 연찬으로 신뢰와 존경을 받는다.

여기에 어린이는 미래지향적이고 창의적인 생각으로 올곧게 생활하며 학부모는 교육공동체의 적극 참여로 학교와 함께 한다.

단양초는 구체적인 노력으로 개인별 맞춤지도를 통한 학력향상과 기본생활습관 지도를 통한 예절교육, 독서교육을 통한 창의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와 함께 특색 교육활동으로는 1인1운동하기와 1인1악기다루기, 하루 10분 책읽기로 행복한 아침시간을 운영하고 있으며 원어민 영어보조교사의 협력수업과 원어민과 함께하는 영어교실, 방학중 영어보충교실로 국제화시대에 대비하고 있다.

단양초 전병우 교장은 "단양초등학교는 100세 대비 참살이 교육 활동과 방과 후 활동에 매진해 학력을 신장함은 물론 어린이들의 행복마인드 제고와 생명 연장 교육을 위해 힘쓰고 있다"며 "우리 교육가족이 함께 학생들의 행복하고 희망찬 미래를 위해 최고의 밑거름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김병학·이형수기자

<인터뷰> 단양초 47회 졸업생 김기일씨

1959년 졸업 47회 졸업생 김기일 전 단양초등학교 동문회장

"당시 교정에 큰 아카시아 나무가 있어서 학생들은 물론 선생님들의 쉼터이자 학교의 상징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단양초등학교 47회 졸업생인 김기일(69) 전 동문회장은 당시의 학교를 이렇게 회상하며 말문을 열었다.

김 전 동문회장은 "제대로 된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는 아이들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가난은 당시의 상징이었다"며 "학교 공부를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등교 자체를 즐기는 아이들이 더 많던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에 가면 제대로 된 교과서도 없고 마분지로 만든 시커먼 교과서가 몇 권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그저 선생님의 수업에 따라 아이들의 눈동자가 따라다니는, 요즘은 상상하기 힘든 수업광경이었다"고 회고했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라 모든 물자가 귀해 학생들은 수업보다는 부수적인 일에 더욱 시간을 할애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땔감으로 쓰기 위한 솔방울 채집과 거름으로 쓰기위한 인분 모으기 등 다양한 일들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특히 현장실습방침에 따라 밭에서 일하고 해충제거, 송충이 잡기 등 갖가지 일로 하루가 바빴으며 집집마다 득실거렸던 쥐를 잡기 위해 강제적으로 할당량을 채워야 했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김 전 동문회장은 "어렵고 힘든 시절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시절을 겪으며 현재의 내가 있게 된 것"이라며 "100년이라는 역사가 그냥 만들어질 수는 없는 만큼 앞으로도 단양초에 대한 기대가 큰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교직생활로 정년을 마친 그는 "고향 단양에 살며 할 수 있는 일들이 많겠지만 내 모교인 단양초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며 "많은 동문들과 힘을 합쳐 후배들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아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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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가 만난 사람들 - 김순구 한국감정평가사협회 회장

[충북일보]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다. 지금은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50~60대인 사람들은 모두 다 공감하는 말이다. 절실 할수록 더 노력하고, 어려 울수록 뼈를 깎는 인고(忍苦)의 세월을 견딘 CEO들이 적지 않다. 김순구 한국감정평가사협회 회장. 그의 이력과 언변을 보면 어려움을 딛고 성공한 사람들의 표상(表象)이라는 사실을 금세 확인할 수 있다. 김 회장을 만나 고향을 향한 큰 그림이 무엇인지를 들어봤다. ◇한국감정평가사협회 주요 업무는 "국민 재산권 보호와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할 목적으로 1989년 설립됐고, 2016년 법정단체가 됐다. 주요 업무로는 감정평가제도 개선, 감정평가사 지도·관리 및 연수, 국토교통부장관 위탁업무 등이 있다. 그리고 올바른 부동산 문화 정착을 위해 부동산 감동교실을 운영하고, 국민에 봉사하고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고자 사회공헌사업도 열심히 수행하고 있다." ◇충북 출신으로 알고 있다.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나 "저는 '마부작침(磨斧作針)'을 늘 생각하면서 자랐다. 아주 어릴 적 아버님께서 작고하셔서 홀어머님이 저를 어렵게 키웠다. 초등학교 시절 함께 자란 친구들이 아버지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