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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학교역사가 말한다 - 충주 엄정초등학교

정계·군 장성·장관 등 97회 졸업 인재 7천85명 배출
현재 7학급 80명·교사 13명 등 근무… 무한한 가능성 키우는 '행복 교육' 펼쳐

  • 웹출고시간2015.08.27 15:38:56
  • 최종수정2015.09.14 17:39:46
[충북일보] 충주시 엄정면 용산리에 위치한 엄정초등학교는 충주지역에서 교현초등학교 다음으로 역사가 오래된 무려 개교 107년이나 된 학교다.

현재의 엄정초 전경

충주시 엄정면은 남한강과 접하고 있어 옛날 목계를 중심으로 내륙수로 교통의 중심지 였기 때문에 인구가 많고 상업이 발달한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특히, '목계나루'와 '내챙이 장터'는 엄정은 물론 인근의 금가면과 가금면(현 중앙탑면), 산척면, 동량면, 소태면, 제천 백운면, 원주 귀래면 등 인근 지역의 중심 역할을 하며 번창했던 곳이다.

이러한 곳에 구한말 국운이 기울어 가던 시기인 1908년11월 4일 교육을 통해 인재를 육성해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숭고한 정신으로 사립 '명신학교'가 설립됐다.

그 이전에는 향교와 서당을 중심으로 한자 공부와 유학(儒學)이 교육의 전부였는데, 개화기 서양 문물이 물밀듯 들어오면서 신식 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올해로 개교 107주년을 맞는 엄정초등학교의 전신인 사립 명신학교가 1908년 처음설립할 당시의 교사 위치(원형 가옥)

당시 지방유지인 윤호, 윤양래, 민준호, 김윤성, 윤태호 등이 힘을 합쳐 엄정면 용산리 토산 김윤성 가옥 사랑채를 교실삼아 사립 '명신학교'를 설립하고 학생 80명을 모집해 개교했다.1909년6월2일 인가를 받았는데 교장은 엄정면장인 이상엽씨가 맡았고 교감은 설립자 김윤성, 교사는 박철,조희성 2명이었으며 수업연한은 4년이었다.

이로써 충북 북부지역 초등교육의 요람이 탄생하게 됐다.

1910년4월16일자 대한매일신보 기사를 보면 '충북 충주군내 사립 명신학교에서 학년시험을 치른후 진급식이 있었는데, 4년급 우등생은 이익중 등 4명이요, 급제생은 윤태일 등 3인, 3년급 최우수생은 최진영 등 2인이요 우등생은 이성중 등 3인,급제생은 김규복 등 14명, 2년급 우등생은 김삼용 등 4명, 급제생은 민영수 등 12명, 1년급 우등생은 지황룡 등 4명, 급제생은 박정득 등 10인이라더라'고 보도해 당시 학생 60명이 재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0년 일제의 한일병탄이 있은후 1911년2월28일 첫 수료식이 있었고, 1912년3월30일 첫 졸업식이 있었다.

1913년10월5일 '명신학교'는 목계에 있던 사립 '통명학교'까지 병합해 현재의 위치인 엄정면 용산리 현 위치 뒤 산기슭에 기와집을 짓고 학교를 이전했다.

1915년9월15일 개교당시의 교사모습

그러다가 1915년8월27일자로 용산리공립보통학교 4년제 설립인가를 받고 1학년은 신입생을 모집하고 2,3학년은 명신학교 생도들을 편입시켜 1915년9월15일 입학식과 개교식을 가지니 이때 재적학생수는 5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로써 엄정초등학교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인지라 교장도 일본인이 부임하고, 교사인 박철씨가 부훈도로 임명되었으며 교원은 홍몽화, 이건덕씨였다.

학교는 해마다 번창해 엄정면은 물론 인접한 금가면, 가금면(현 중앙탑면),동량면, 산척면, 소태면, 제천군 백운면, 원주군 귀래면에서 학생들이 모여 들었다.

개교한지 2년후인 1917년3월24일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하니 이때 졸업생은 남학생 6명이었으며, 제1호 졸업장을 받은 민영수씨는 일본에까지 유학해 평양법원 판사, 광복후 감찰위원장(현 감사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1917년부터는 여학생도 입학생이 있어 1921년3월25일 제5회 졸업식때 처음 여학생 5명이 졸업을 했다.

그후 1924년2월8일자로 6년제로 승격됨에 따라 1924년과 1925년은 자연적으로 졸업생이 없었고, 1926년3월25일 제8회 졸업생부터 6년과정을 마친 졸업생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1933년 3월31일 엄정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이 개칭되었고, 1938년 4월1일부터 엄정공립심상소학교로 다시 개칭되었다가 1941년4월1일부터는 엄정공립국민학교로 불리게 됐다.

1938년 아침조회 모습.중일전쟁 이후 군사교육의 일환으로 아침조회시 열병식과 분열식을 했다.

일제 강점기 수업은 한글말살정책으로 일본어를 매주 10시간씩 수업하는 대신 조선어와 한문은 매주 6시간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전시체제로 만들고, '국가총동원령'을 공포하고 '내선일체'니 하며 온나라가 전쟁지원에 나서야 했으며, 조선총독부는 일본의 황실과 일본국가에 대한 관념을 가르치기 위해 '황국신민서사' 를 제정, 낭독하도록 강요했다.

1939년에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젊은이들은 전쟁터로 내몰렸고, 어른들은 근로봉사 등에 강제동원되어 일손이 부족하자 학생들을 모내기며 벼베기,퇴비증산을 위한 풀베기, 송진채취, 관솔채취 등에 동원했으며 심지어 배당량을 하교후나 방학숙제로 내주기도 했다.

특히 우리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1940년 '창씨개명'을 강요했고 아침조회시 '신사참배'를 강요했는데 신사가 없는 학교에서는 일왕이 있는 동쪽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동방요배'를 강요했으며, 조기군사교육으로 열병식(사열과 분열)을 실시했다.

엄정전통관에 보관되어 있는 엄정초 학교종

1943년 징병제가 공포되고 1944년에는 쌀 강제 공출제와 여자정신대 징발이 있었다.

이렇게 전쟁 광분에 날뛰던 일본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미국의 원자폭탄 공격을 받고 1945년8월15일 연합군에 항복,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게 됐다.

이에 광복과 더불어 잠시 휴교됐다가 1945년9월28일 미군정하에서 다시 개교했고, 이때 상석 훈도인 송재섭씨가 일인교장으로부터 학교장 사무를 인수받아 학교 업무를 취급하니 학생수가 무려 1천49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945년10월20일 한창효 교장이 광복후 첫 교장으로 부임, 비로소 우리말로 공부를 하게 됐다.

1950년5월1일 엄정국민학교로 불리다가 6.25전쟁으로 휴교했는데 당시 재학생수가 남자 419명, 여자213명 총632명이었다.다시 1.4후퇴로 휴교했다가 1951년4월24일 재차 복교하니 피난민 학생 19명(강원11명, 서울8명)포함 겨우 302명이었다.

엄정초 개교 100주년 기념탑

이같이 격동의 역사와 함께 학교도 온갖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면서 오늘에 이르렀고, 현재의 교사는 1993년8월23일 신축됐다.

엄정초는 2015년2월현재 97회 졸업에 7천85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정치계와 군 장성,장관,군수,시장,법조계,재계,교육계,의학계, 도시군의회 등 각 분야에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현재 초등학교 7학급 80명(특수학급 1학급 포함), 유치원 1학급5명, 교사는 김두환 교장을 비롯해 13명, 직원 10명 등이 근무하고 있다.

김두환 교장은 "정보화, 세계화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미래를 여는 창의적 인재를 육성하기 위하여 기본이 바른 인성교육을 강화하고, 타고난 저마다의 꿈과 끼를 계발하도록 열심히 가르치며, 무한한 가능성을 항상 인정하고 지원 격려하는 함께 행복한 교육을 펼치고 있다"고 말했다.

충주 / 김주철기자 kimjc5611@hanmail.net

<인터뷰>22회 졸업생 송태윤씨(전 엄정초 교장)

"내가 1926년 생이여.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 합병한후 식민지정책을 노골화 할때 태어났고, 1934년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는 일제가 전쟁 광분에 날뛰던 해로, 인도지나를 함락했다고 축하 시가행진을 강요 당할 때여. 그야말로 참담했지."

엄정초 22회(1940년) 졸업생으로 모교 교사로 최장기 근무했고, 1991년 모교 교장으로 퇴임하고 총동문회장도 역임해 누구보다 엄정초 역사를 잘아는 송태윤(90)씨는 80여년전 상황을 또렸하게 떠올리며 참혹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당시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 진출을 시도하고, 1932년 이봉창 의사가 동경에서 일본 히로히토 천황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과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해 다수의 일제 수뇌들을 죽거나 다치게 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어수선하던 때였다고 한다.

특히 1937년은 중일전쟁이 일어나 '국가총동원령'이 공표되는 등 온 나라가 전쟁지원에 나서야 했고, 1939년에 2차세계대전이 발발해 온 세계가 전쟁의 도가니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송씨는 9살인 1934년 엄정초등학교에 입학, 1940년3월에 졸업을 하게 됐다.

송 씨는 "학교 다닐때는 전쟁물자를 댄다고 소나무 송진 채취, 관솔채취, 토끼잡이에 동원됐고, 퇴비증산을 위해 풀베기에도 동원됐다"며 "특히 1940년부터 '창씨개명'으로 조선이름을 못쓰게 했고, 수업도 일본 말로만 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조선어 수업이 있었으나 3학년때(1937년)부터 못쓰게 했으며, 학교내에서 조선말을 쓰다가 적발되면 벌금을 물리는 등 엄하게 했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엄정에 '신사'가 없어 신사참배는 하지 않았어도 신사처럼 가건물을 지어 조회시간마다 동쪽을 바라보면서 일본 천황의 무사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90도 경례를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6학년때 음성출신의 김상현 선생님은 창씨개명에 일본어 수업을 하는 중에도 '너희는 조선사람이다. 근본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민족혼을 심어 주셨다"고 회상했다.

이후 송씨는 청주농업학교(5년제)를 졸업하고 충주군청에 공무원으로 5년 다니다가 1956년부터 엄정초에서 교사를 시작, 1991년 엄정초 교장으로 퇴직할때까지 35년간 교직에 있었다.

지금도 고향인 엄정면 괴동리 내창마을에서 살고 있는 송씨는 "다시는 나라 잃는 어리석음을 겪어서는 안된다"며"비록 분단된 현실이고 일본과 중국, 러시아 등 열강에 둘러쌓인 지리적 불리함이 크지만 5천만 국민들이 똘똘 뭉쳐 국력을 튼튼히 해 세계속에 당당히 우뚝서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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