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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란

작가

연일 찜통더위다 보니 '더위에 어떻게 지내느냐'가 인사다. 더위를 날릴 묘수는 무얼까. 책을 뒤적이다보니 이런 글이 있다. 다산정약용의 시(詩)소서팔사(消暑八事)에 활쏘기, 투호놀이. 바둑 두기. 매미소리듣기, 연꽃구경하기, 달밤에 발 씻기, 그네타기, 시 짓기를 피서법으로 그렸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피서법은 봉숭아꽃물 들이기다. 깊어가는 여름 밤, 봉숭아꽃잎을 콕콕 찧어 손톱에 올리면 내 마음에 오롯이 들어차는 꽃물을 생각하며 더위를 잊는다.

봉숭아꽃은 내게 애틋한 꽃이다. 꽃을 보면 고향을 생각하고 외할머니가 그립다. 시골 외가댁 장독대 옆엔 해마다 봉숭아꽃이 피었다. 오래 전, 기억에도 또렷한 여름밤이었다. 외할머니는 캄캄한 뒤 뜰 장독대에 앉아 봉숭아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계셨다. 그 모습이 어린 마음에 알 수 없는 슬픔처럼 느껴졌다. 돌아보면 대종가의 종부로 살았던 할머니에게 봉숭아꽃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 날 이후 내 마음 속엔 봉숭아꽃과 할머니의 모습이 늘 겹쳐 떠올랐다. 찧은 꽃잎을 손톱에 올려 무명실로 꽁꽁 동여매던 날, 아파 움찔 놀라는 날 보며 예쁘게 물들이려면 이것쯤은 참으라던 음성엔 사랑의 꽃물로 흠뻑 젖어있었는데. 이제 세상에 계시지 않으니 봉숭아꽃이 그저 꽃으로만 생각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처음 꽃물을 들이던 날, 난 어떻게 딱딱한 손톱에 물이 들 수 있냐고 할머니께 여쭸다. 답은 간단했다. 하루 밤 얌전히 자면 물이 든다고 말씀하셨다. 말씀대로 꽃물이 빠질까봐 뒤척이다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하얀 무명실에 물든 핏빛 붉은색이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찬찬히 실을 풀었을 때 손톱위에 붉게 물든 꽃물을 보며 얼마나 신기해했었던지. 밤새 눌려 있던 손가락은 쪼글거렸고 윗 부분 손톱에 다홍빛 달이 걸려 있는 게 아닌가.

여름 밤, 할머니가 흔드는 부채바람을 쐬며 손톱 위 반달을 바라보다 스르르 눈을 감으면 꿈결인 듯 잠결인 듯 상상의 세계를 날아다닌다. 동화 속 소녀는 반달을 타고 어느 날은 알프스의 하이디가 되었다가 다음 날은 소공녀가 되고 어느 날엔 아기천사가 되어 천국의 뜨락을 거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손톱 위 반달이 조금씩 사라지면서 그믐달로 변할 무렵 나는 더 이상 동화 속 소녀에 머물 수 없었다. 나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고 내 영혼으로 조금씩 꽃물이 들어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렇게 반달이 뜨고 지길 여러 해, 결혼을 하고 내 자신 부모가 되어서야 꽃물 들인다는 것이 내 자신 꽃물이 되어야함을 알았다.

내 손톱엔 아직도 내 마음에 물들여 놓은 고마운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오롯이 남아있다. 마치 봉숭아꽃이 자신의 살과 뼈 전부를 던짐으로써 누군가의 몸과 마음에 고운 꽃물을 들여놓았듯. 누군가의 마음으로 스며든다는 것, 물을 들인다는 건 자신을 철저히 내려놓아야만 가능할 일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내가 꽃물이 되기보다 누군가가 꽃물이 되어 주길 원하는 것 같다. 인간에게 진정한 꽃물은 무엇일까. 꽃물이 되어 준다는 것 그것은 거대한 게 아니라 상대에 대한 아주 작은 관심과 애정에서부터 물들여지는 게 아닐까.

달빛이 옥수수 잎에 푸르게 물든 달밤. 대청마루 뒷문을 활짝 열어젖히면 뒤 곁을 오가던 바람이 뼈 속까지 시원하게 직방 들어온다. 여름밤은 깊어가고 할머니와 손녀는 봉숭아꽃물을 정성스럽게 들이고 있다. 바람이 시간을 거슬러 내 방까지 들어왔다. 더위가 어디 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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