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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학교역사가 말한다 - 진천 상산초등학교

독립운동가 이상설·이상직 선생 항일구국계몽운동 일환 학교 세워
1940년대 진천 갑부 이호신 선생 토지 희사… 7천여 평 부지 마련
1941년 '상산공립국민학교' 개칭… 일본 국권 침탈 본격화 시기 신학 가르치던 근대학교 효시
민족의 격동기를 꿋꿋이 겪으며 현재 졸업생 1만7천396명 배출

  • 웹출고시간2015.07.09 15:26:29
  • 최종수정2015.07.20 14:24:58

현재의 학교전경과 100주년 기념탑

[충북일보=진천] △진천에 근대 교육의 씨앗을 뿌린 이상직 선생
진천군 진천읍 시내 한복판에서 100여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지역의 동량을 길러내고 있는 상산초등학교.

이 학교는 "국가의 부강은 교육에서 시작된다"는 갑오개혁 이후의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영향을 받은 지역의 한 독립투사의 헌신적 노력으로 탄생됐다.

1895년에 발표된 '교육입국조서'는 당시 선각자들이 사재로 학교를 설립하고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게 하는 운동력이 됐다.

과거 상산초등학교 정문. 아직도 진천상산국민학교로 표기가 돼 있는 정문 기둥이 보존돼 있다.

진천지역에도 이 무렵 신학문을 교육하는 학교가 설립 되었다. 진천지역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보재 이상설 선생과 사촌형제인 이상직 선생이 항일 구국 계몽 운동으로 세운 문명학교가 바로 지금의 진천상산초등학교다.

이상직 선생은 구한말 복잡한 국내 정세와 외부 열강의 패권쟁탈로 인하여 우리 민족이 시련을 겪고 있던 1878년 진천에서 출생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서울의 큰아버지 댁에서 독립운동가인 이상설 선생과 숙식과 수학을 같이 하면서 진충보국의 기틀을 다졌다. 이상설 선생의 집에서 수학하는 동안 그곳에 출입하는 이성훈, 이시영, 이회영, 정인보, 이범세 등과 사귀며 국내외 정세를 파악할 수 있었다.

당시 이들은 점점 기울어져가는 국권을 바로 잡아 보고자 노심초사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이 일본에게 박탈되자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선진 국가의 교육 방법을 도입, 문명인을 양성하는 길밖에 없다는 판단으로 그해 10월 진천으로 낙향해서 사립·보통상산학교를 건립했다.

이 때 세워진 학교는 말이 학교지 선생의 자택을 교실로 개조한 것으로 조선시대 서당보다 더 열악한 환경이었다. 선생은 당시 교육에 대한 경시풍조가 만연했던 지역 토속세력의 완강한 힘과 맞서 그들을 설득 이해 시키며 학생들을 모집했다. 이 학교는 진천에서 처음 근대 교육의 씨앗을 뿌리는 계기가 된다.

△공립학교로의 출발

당시 사립 보통상산학교는 개교 당시 생도로 이철해, 주익환 등 4명 이었으며 교육 내용으로는 한문, 국어, 산수. 지리, 역사, 법학, 체조, 가창을 가르쳤다.

하지만 이 학교는 한일합방 후 일제의 사립학교 탄압으로 폐지되고 1911년 6월 진천군에 공립보통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그해 10월 진천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게 된다.

1913년 현재의 삼수초등학교 부지에 교실2, 교무실 1개로 교사를 건축했다.


또 같은 해 제 1회 졸업식을 거행하였는데 그 때 졸업생 수는 모두 19명이었다. 1941년 4월 1일에는 학교 이름을 '진천상산공립보통학교' 라 개칭하고 진천 지역 민족 교육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배움의 전당을 마련해 준 독지가 이호신 선생

이호신 선생

1940년대 현재의 삼수초등학교터에 있던 진천상산초등학교는 급격하게 늘어나는 학생 수를 감당하기 어려워 교사 증축이 시급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부지가 좁고 재정 형편에도 많은 어려움이 뒤 따랐다. 이 같은 어려운 환경을 접한 당시 진천의 최대 갑부로 알려졌던 이호신 선생이 토지 500석 지기의 부지를 희사해 지금의 위치에 부지 7천 여 평을 마련했다.

선생이 내놓은 부지에 교사 2동과 부속 건물을 지어 1940년 11월 이사하게 된다. 이로써 비교적 제대로 된 교육시설이 갖춰진 새로운 배움의 전당을 마련하게 됐다. 당시 이호신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교정에 장학비가 현재의 은행나무 아래 세워져 있다.

이 후 1941년 진천상산공립국민학교로 개칭되었고 1948년에는 교가를 제정했다.

△민족의 격동기를 함께 걸어온 진천상산초등학교

대한제국 말 일본의 국권 침탈이 본격화 되던 시기에 진천에서 신학문을 가르치는 근대 학교의 효시로 출발한 진천상산초등학교는 민족의 격동기를 함께 겪으며 걸어왔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의 황국신민정책으로 인해 한민족의 민족 문화 말살 정치 및 철저한 식민지 통치 시대를 겪어야 했다. 해방 후에는 3년간의 미 군정과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 중에도 교육 활동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진천상산초등학교는 2015년 2월 103회 졸업식이 있었다. 현재까지 총 1만7천396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학교 졸업생 중에는 진천교육지원청 초대교육장을 지낸 조영원(2회 졸업), 농림부장관과 제 7,8,9,10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운갑(15회 졸업), 고려학원과 성심학원을 설립하고 학교법인 성심학원 이사장을 지낸 박용숙(32회 졸업). 전주지방검찰청 검사장과 내무부장관을 지낸 백광현(33회 졸업), 서울대학교 고미술사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는 안휘준(43회 졸업), 현 경기도교육감인 이재정(44회 졸업) 씨 등의 걸출한 인재를 배출했다.

이호신선생 장학 사업비

오늘날에도 진천상산초는 진천 지방 초등교육 기관의 견인차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진천 / 조항원기자

<인터뷰> 이상일 선생(진천상산초 36회 졸업)

"상산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일본 식민지 하에서 교육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진천상산초를 졸업하고 진천지역에서 오랫동안 교직에 몸담았던 이상일(83. 36회 졸업)선생은 "해방 전에는 등교 전 모든 학생이 애국반에 모여 2열 종대로 줄을 서서 신사에 들러 신사참배를 한 후 등교해야 했다"며 그 당시 단편적 생활의 일과 시작에 대해서부터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그는 "혹시라도 지각을 하거나 결석을 하면 일본 교사들에게 벌도 받고 심하게 매도 맞는 등 생각하고 싶지 않은 만행이 자행되었다"고 회고 했다.

특히 학교에서 일본어를 쓰지 않으면 일본 교사로부터 뺨을 맞거나 벌을 받는 등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했다. 그래서 학생들이 몸짓, 손짓으로 의사표현을 해야 했기 때문에 학교생활이 더욱 어려웠다고 회상했다.

그 당시 학교 과제로는 퇴비 가져오기·장작 가져오기 등이 있었고 가끔 나오는 여자용고무신 배급이 있었는데 신발이 귀했던 그 시절에는 남학생이지만, 여자 고무신을 신고 등교하는 학생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또, 썩은 콩깻묵이 배급으로 나와 이를 먹고 학생들이 배탈이 나고 고생한 적이 있다고 했다.

학교 수업 시간에는 진지한 공부를 해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교과서도 없었다고 당시 열악한 교육환경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지금은 생각도 못할 어린학생들이 겪었던 고생 담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당시에는 먹을 곡식이 없어 쑥 뜯고, 콩 심고, 방공호에 수시로 드나드는 전시훈련이 일과였다고 한다. 또 일요일에는 애국반 학생끼리 모여 송진을 모아 학교에 내야했다고 증언했다.

그래도 초등학교 시절 재미있던 기억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기억이 별로 없다. 행복이 뭔지도 모르고 보낸 시절이었다" 고 했다. 또 "그 당시에는 지금의 강당 자리에 연못이 있어서 참 예쁘고 구경할 것도 많았는데 지금은 그 연못이 없어져서 아쉽다" 고도 했다.

그러면서 "4학년 여름에 해방이 됐고 진천읍내에 있던 신사에 누군가가 불을 질러 불길이 솟는 모습을 보고 마냥 기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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