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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5.05.14 19:00:09
  • 최종수정2015.08.17 14:53:52
[충북일보] 일제의 침략이 한국의 숨통을 조이려고 광분하던 1908년에서 1909년에 의병투쟁도 상대적으로 격화됐다. 1908년 후반에서 1년간 3천714번의 전투가 벌어졌고 1만2천130명의 의병이 국권회복전투에 참가하여 격렬한 투쟁을 전개했다.

다음과 같은 글이 당시의 참상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내가 제천에 이르렀을 때는 햇살이 뜨거운 초여름이었다.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 제천시내 한 가운데 아사봉(현재 중앙공원)에는 펄럭이는 일장기가 밝은 햇살아래 선명하게 보였고 일본군 보초의 총검 또한 빛났다.
나는 말에서 내려 잿더미 위를 걸어서 거리로 들어갔다. 이렇게 완전히 파괴된 것을 이전에 본 일이 없었다. 한달전까지만 해도 번화했던 거리였는데 그것이 지금은 시커먼 잿더미와 타다 남은 것들만이 쌓여 있을 따름이었다. 완전히 벽 하나, 기둥 하나, 된장 항아리 하나 남지 않았다. 이제 제천은 지도 위에서 싹 지워져 버리고 말았다'

이글은 영국의 데일리메일 신문 맥켄지 기자가 쓴 글로 일제가 의병활동의 중심지인 제천을 불태워 초토화할 당시 참상을 '조선(대한제국)의 비극' 이라는 책 속에 소개한 내용이다.

제천은 항일의병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던 곳이다. 맥켄지 기자의 글은 제천지역에서의 항일 의병활동이 다른지역보다 왕성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백운초의 역사

백운초 17회 졸업식

백운의 교육을 이야기할 때 3대 성씨가 등장한다.

여흥 민씨와 파평 윤씨 그리고 전주 이씨 집안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집안의 선조들은 국왕으로부터 많은 땅을 하사받았고 후손들은 선조들로부터 받은 많은 재산을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해 자신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준 소작인들의 자제들을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과 지역 발전을 위해 희사하시어 재산의 사회환원 사업에 앞장서 후대의 귀감으로 지금까지도 칭송을 받고 있다.

퇴금(退琴) 민영복(閔泳復) 선생은 본관은 여흥, 호 퇴금이다.

백운면 화당 출신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부승지(左副承旨)로 고종22년(1885년)에 진사시에 합격해 비서승(·書承)의 벼슬을 지내다가 외직으로 무주, 금산, 장흥 등에서 군수로 재임 중 고종42년(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백운초등학교의 전신인 흥명학교를 설립해 인재 양성에 노력했다.

또 백운학원의 창설자이신 윤성(尹·)은 본관은 파평이고 호는 연거(然居)다. 백운 구로회(九老會)를 1957년 9월 9일에 백운면에 거주하는 아홉 노인들이 결성하고 경은사 앞 개울가에 있는 자연석 바위에 9명(민춘식, 심상옥, 이용태, 민정식, 윤흠, 신형묵, 윤성, 민건식, 허선)의 호와 이름을 각인했다. 구로회원들은 사회물정을 토론하고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기도 했으며 지역의 전통 도덕을 지키는데 솔선수범을 보였다.

백운면에서 양조장을 처음으로 경영한 사업가로 애국지사 활동 자금을 은밀히 대주기도 했다는 기록과 교육자인 동시에 사업가, 선각자라는 기록이 있다.

# 백운면에서의 독립운동

1941년 일본제국주의는 소년병학교 지원제를 빌미로 재학생까지도 강제 징발해 전쟁터에 또는 병기제조공장으로 끌고 갔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 일제는 징병제를 실시해 수학 연한을 단축하면서까지 명분없는 싸움터에 총알받이로 한국의 젊은이들을 몰아세웠으며 종군위안부라는 미명하에 우리나라 젊은 여성들을 일본군의 성노리개로 몰아넣었다.

공포와 억압 그리고 착취로 일관하던 일제의 식민교육도 반만년을 이어온 우리 민족의 끈기와 인내, 항거와 투쟁의 결과로 광복된 조국을 맞았다.

36년간의 고초와 아픔을 겪은 제천시 백운면민들은 해방이 되던 날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사방통문을 돌린 것도 아니지만 남녀노소 모두가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그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이들은 언제 준비했는지 손에는 태극기가 쥐어져 있고 기쁨의 만세소리가 이어졌다. 방금 피운 곰방대도 찾지 못하던 할아버지도, 어제 사용한 호미가 어디 있는지 모르시는 할머니도 어디엔가 깊숙이 감추어 둔 태극기를 들고 있었고 언제 그렸는지 모를 태극기를 든 군중들은 길을 빽빽하게 메웠다고 전한다.

1930년 당시 백운초학생들의 공부하는 모습.

일본말을 몰라 반 언어장애인 행세를 하여야 하던 고통도, 손짓 발짓으로 통하던 불편함도 모두 잊고 한꺼번에 쏟아지는 '대한독립만세!' 라는 우리말 홍수, 남몰래 식구들끼리만 눈치보며 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말, 내 이야기 들어보라고 서로 목청 돋우며 끝없는 이야기꽃을 피우던 날이었다고 백운초 100년사에 기록돼 있다.

백운초 100년사에는 '사람들의 대열을 뒤따르니 학교운동장에 모든 면민들이 모여서 해방의 기쁨을 우리말로 이야기하며 그동안 고생과 압박의 설음을 토해내며 밤새는 줄 몰랐다. 나라를 잃었던 서러움과 광복의 기쁨은 만세소리로 이어졌고 풍족한 잔치가 이루어졌다. 있는 것 없는 것 내놓아 음식을 만들어 나누어 먹으며 노래하고 춤추고 운동경기를 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연출되었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또 "구국의 의지로 민족의 지도자 양성을 위해 퇴금 민영복 선생이 백운초등학교의 전신인 사립(私立) 흥명학교(興明學校)을 설립한지 38년만이요, 그토록 조국광복을 염원하며 후진양성을 위해 진력하시다가 별세한지 7년만'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날 광복의 기쁨을 함께 하기 위해 모인 군중들은 퇴금 선생님의 학교 설립의 큰 뜻에 고마움의 눈물을 흘리며 그동안 퇴금 선생님에게 고마움을 표시 못했던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후로 자연스럽게 매년 8월 15일이며 집집마다 십시일반으로 양식을 거두어 음식을 장만하여 학교운동장에 모여 퇴금 선생의 큰 뜻을 추모하고 광복의 기쁨을 나누는 의미있는 마을 대항 체육행사가 이어졌으며 총동문회가 결성됐다.

학교 운동회 모습 1930년대

매년 8월 15일이면 전국에서 동문들이 스스로 학교운동장으로 모이는 행사가 지속되고 있다.

아픔의 역사도 우리의 역사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일제잔재 청산이라는 미명하에 모든 자료가 사라지고 있는 현실은 안타깝다.

백운초의 기록들은 '6.25사변으로 인하여 자료 소실'이라는 사실만 확인했다.

1945년 이전 자료는 졸업생 명부는 물론 교직원 명부, 심지어 역대 교장 선생님 명부도, 단 한 장의 사진도 학교에는 존재하지 않아 동문들이 보관하고 있던 자료들을 도태로 백운초 100년사를 만들었다.

권혁미 교장은 "백운초의 역사는 항일운동의 역사와 함께 한다고 해도 부족하지 않다"며 "백운의 역사는 제천의 역사인 동시에 민족항일운동의 역사를 가장 잘 보존하고 인식하고 있다고 봐야한다"고 말했다.

/김병학 강준식기자


"민영복 선생, 일제 협박에도 혼신 다해 공립화 거부"

이세영(83.백운초 26회 졸업)씨는 "사립 흥명학교가 시작된 평동의 민가(民家) 위치는 현재 백운 농업협동조합의 농약, 비닐 등을 파는 농협 경제사업장 자리다"라며 "그곳은 자연마을 이름이 창말로 이곳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집으로 학당이 있었던 집이라는 이야기를 어릴 때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일제가 사립학교 비용령 등을 통해 경제적으로 학교운영에 압박을 가해 눈에 가시와 같은 흥명학교의 공립화를 집요하게 추진했다"며 "민영복 선생은 일제의 온갖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온 가산을 학교경영에 쏟아 부으면서까지 흥명학교 유지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공립화를 거부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현재의 학교부지(평동리 600번지)에서 건물을 완공하고 졸업을 하는 것이 꿈이었으나 외관만 완성하고 주변 청소에 많은 작업을 하던 생각이 난다"며 "5년간의 노력 끝에 현재의 학교로 이전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학교다닐때는 우리나라말을 못쓰게 해 집에 가서도 부모님들이 일본말을 몰라 우리나라말을 사용한다고 학교에 말을 하면 종아리를 때리기도 했다"며 "송진 등을 캐어오라고 시키기도 했다"고 말했다.

특히 "당시 일본인 교사도 많았고 한국인 교사도 많았다"며 "징용 보급대 등에 백운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끌려갔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 씨는 "광복당시 병원의사와 지서장, 과수원 운영, 우체국장 등 일본인 8명 정도가 살고 있었다"며 "이들은 광복이 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아침에 나가보니 이들은 모두 도망가고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 다닐 당시 바가지에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던 기억도 있다. 신발은 게다를 신고 다녔다. 운동화는 몇 켤레 없어서 제비뽑기로 사기도 했다"며 "교육은 일본역사를 배우고 일본어를 배우는 등 악랄하게 일본식 교육만 시켰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 기획물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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