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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학교역사가 말한다 - 청주 주성초등학교

분노·가난에 시달리면서도…"말과 글 잃지 말자" 열공

  • 웹출고시간2015.04.30 17:47:18
  • 최종수정2015.08.17 14:53:45
[충북일보]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며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근대적인 학교제도의 도입이라는 명분아래 민족사상 말살을 위한 동화교육 즉 식민교육을 악랄하게 실시했다. 대표적으로는 우리말을 쓰지 못하고 일본어를 국어과목으로 하였으며 노동력 착취를 위한 저급한 실업교육을 널리 실시하며 위압적인 교육을 통해 순종하는 국민을 기르고자 혈안이었다.

매사 일본인의 눈을 피하여야 했고 한국인 선생님과의 은밀한 교감으로 저항의식을 기르며 말과 글을 잃지 않았다. 중학교에 진학한 청소년의 몸으로 3.1운동에 가담했고 옥고를 치른 학생도 있다.

# 주성초 태동


청주 주성초(교장 김진헌)는 1897년 충북에서 두 번째로 개교한 학교다.

당시 청주공립소학교로 시작한 주성초등학교는 청주관아 부속건물에서 개교했다. 이같은 내용은 같은해 9월17일 관보(434호 9.21)에 공고됐고 그해 10월30일 김계명 교사와 다음해 4월23일 유학수 교사가 주성초로 발령이 났다.

이후 1907년에 새로 건축한 교사건물이 있었고 1908년에 작성한 학교위치도는 당시 주성초가 현재 청주시 서문동 쥬네스 남쪽에 위치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주성초는 옛 청주관아의 삼문과 청령각(옛 청원군청내)에 위치했다는 기록과 학교앞에 무심천을 건너던 62m의 돌다리(석교동 지하에 있음)가 있음을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다.

1907년 민영은 초대교장이 취임해 학교를 운영해 왔다.

1922년 새 교사를 신축해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고 지역의 유지들을 중심으로 성금을 모아 1923년 강당을 신축했고 교사를 신축과 교지를 확장하고 사택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같은 지역민들의 은덕을 입어 주성초 학생들은 온갖 수모와 참기 어려운 분노와 가난에 시달리면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가업을 잇고 지역사회를 위해 일하고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인재들로 자라났다.

# 학생의 다양화

1909년(융희3년) 주성초는 원대규 교장이 3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당시의 학생수는 1학년이 60명으로 이중 여자가 8명이 있었다. 2학년은 50명, 3학년 50명 등으로 모두 160명의 학생이 주성초를 다녔다.

특이할 만한 기록은 1학년과 2학년의 기혼자는 각각 4명, 3학년은 5명의 기혼자가 학교를 다녔고, 학생들의 연령은 1학년은 8세부터 16세, 2학년은 9세부터 18세, 3학년은 10세부터 17세까지 연령층도 다양했다.

학부모들의 직업은 농업이 79명, 공업이 4명, 상업이 38명, 관리 25명, 서업 14명 등이었다.

# 졸업식과 학교발전



주성초의 첫 졸업식은 1911년 4월1일 가졌다. 첫 졸업생은 32명으로 이들은 졸업과 동시에 동창회를 조직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당시에는 청주교동초의 전신인 사립보성초등학교 남학생들이 편입했고 보성학교는 보성여학교로 개편됐다.

그해 9월 학교에 전화가 가설(120번) 돼 학생들이 신기해 하기도 했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특히 1912년 2회 졸업생 31명은 졸업기념으로 거울을 기증했다. 이 거울은 현재 교내의 주성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1913년에는 드디어 첫 여학생인 서정임(徐貞任)씨가 3월25일 졸업했다. 당시 교사 1동을 증축했는데 비용은 절반을 지역의 유지들이 부담한 것으로 기록이 돼있다.

1914년 10월에는 청주망선루를 수리해 사무실로 사용하기도 했다. 1921년 1월에는 학년은 4년제에서 6년제로 연장하고 3학급을 증설했다.

그해 4월 각종 질병의 주범인 파리를 잡기위한 운동을 현상금까지 걸기도 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파리잡기 포스터에는 '파리를 죽이고 애기를 살리자'라는 문구가 있는 홍보물도 있었다.

1922년에는 청주시민들의 향학열과 학년연장으로 인해 학급수가 급격히 증가해 학생들을 교실에 수용하지 못해 일본인 소학교(중앙초) 또는 공자묘(향교) 등에서 수업을 하기도 했다. 그해 7월 교실 12칸을 마련해 남학생들은 신축교실에, 여학생은 구 교실에서 수업을 받았고 망선루는 제일교회에 매각됐다.


현재의 주성박물관은 1923년 지방의 유지인 민영은 방인혁 김원근 전평태 외 수십여명이 기부금을 냈고 충북선 철도부설 공사 업자인 청수조합의 특별찬조로 신축됐다.

1925년에는 첫 2부제 수업이 실시되기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현재 학교에서 사용중인 교표는 1929년 4월 이광익교사의 도안으로 만들어 사용됐다. 모양은 태양이 구심에서 크게 원을 이루듯 꽃술과 꽃잎이 정삼방향으로 펼쳐진 것으로 크기는 사용하기에 따라 달리 만들어졌다.

이 교표는 태양을 중심으로 천지인의 조화를 이루는 것과 같이 학생들도 절의와 긍지, 창조의 정신을 가득히 담아 자랑스러운 꽃송이가 되자는 다짐이다.

1941년 4월 교명이 청주영정공립국림학교로 교명이 변경됐다.

# 육영교 준공

1931년 주성초 정문앞에 육영교라는 다리가 놓여졌다. 이 다리는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지역민들의 지원과 협조로 길이 6.5m, 폭 4.5m, 난간 14칸으로 화강암의 난간 기둥에 '육영교(育英橋) 소화육년십월(昭和六年十月) 준공'이라는 기록이 새겨져 있었다.

이 다리는 1973년 학교옆을 흐르는 좁은 개울 복개사업으로 철거가 됐다. 이 다리는 42년간 열정으로 배우고 가르치는 1만여 학생과 교직원들이 아침 저녁으로 건너던 추억의 다리로 기억되고 있다.

주성초는 청주의 역사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주성박물관은 교내에 위치해 있으면서 각종 유물과 기록을 가장 확실하게 보존하고 있다.

/김병학.강준식기자

민병구 주성박물관장 인터뷰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 날 가슴이 쩌릿했어."

올해로 개교 109년을 맞은 청주 주성초등학교. 민병구(79) 주성박물관장은 1945년 광복 당시 주성초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광복 이틀 뒤인 1945년 8월17일 광복 소식을 들은 민 관장은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대한민국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민 관장은 "어른들이 광복했다는 말에 어려서 잘은 몰랐지만 가슴에서 뭔가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등교하기 전 항상 묵념을 했다. 1940년대 민족말살정책을 펼치는 일본이 신사참배 등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묵념을 하면서 일본천황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는 묵념을 했다.

당시 일본은 '교육에 관한 칙어'를 기초로 '조선교육령'을 제정, 우리 민족의 민족의식을 빼앗고 문화를 말살해 일본에 절대복종하고 순종하도록 만들려고 했다.

민 관장은 "학교 정문 앞에 교육칙어봉향소가 있어 등교 때 항상 묵념을 하게 했다"며 "한마디로 일본인이 되겠다고 맹세를 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주성초 정문 앞에는 교서천이 흘렀고 육영교라 불리던 다리가 있었다.

주성초 주변은 청주역사 등 주요 기관이 많아 일본인이 거주하는 관사가 주를 이뤘다.

그는 "광복하고 6학년 선배들이 일본인 관사에 가서 일본 아녀자들한테 큰소리를 쳤다"며 "나중에 선배들한테 물어보니 당시 일본인 교사들이 우리말을 쓰는 학생들을 찾아내 혼을 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이어 "부끄럽지만 일제강점기 때 영정학교(현 주성초)가 친일교육에 앞장섰다"며 "일본인 교사들이 지독하고 철저하게 친일교육을 실시했다"고 회고했다.

주성초 내에 있는 주성교육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시절 준공된 건물로 강당으로 사용됐었다.

지난 2001년부터 이 건물은 주성초 동문들이 기증한 물건 등으로 학교의 100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민씨는 "이 건물(주성교육박물관)은 당시 학부형들과 지역 유지들이 아이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해주기 위해 직접 모금해 1923년 준공했다"며 "일본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나 우리 민족의 의지로 지은 건물"이라고 말했다.

이어 "일본인들이 강당이 목조 건물이라 화재에 취약하다는 것을 빌미로 철거 위기에 놓이기도 했었다"며 "동문들이 지금껏 지켜온 건물로 우리 민족의 애국과 우국정신이 담겨있는 상징성 있는 건축물"이라고 덧붙였다.
이 기획물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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