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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에서 채석했고 연 5천여명 동원, 영조태실

1728년 무신란

  • 웹출고시간2015.04.23 17:41:03
  • 최종수정2015.04.23 17:41:03

조혁연 대기자

[충북일보] 조선 조정은 왕실이나 국가적으로 큰 행사가 있을 경우 도감과 의궤청 등 2개의 임시기구를 설치했다. 도감은 행사를 총괄 집행하고 의궤청은 말 그대로 의궤를 제작했다. 의궤는 후세를 위해 행사의 전말과 경과, 소요된 재용과 인원, 의식절차와 행사 후의 논상(論賞) 등을 기록해 놓은 책을 일컫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의궤는 어람용, 의정부, 예조, 사고(史庫) 보관용 등 5~9부가 제작됐다. 영조의 태실을 가봉할 때 만든 의궤도 존재하고 있고, 현재의 명칭은 '영조대왕태실가봉의궤'이다. 이 의궤는 우연찮게 발견됐다.

충북도 문화재계와 청원군청은 지난 1981년 영조 태봉과 관련된 석부재가 일제 감정기에 파괴된 채 산 아래 계곡에서 나뒹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현장조사에 나섰다. 이때 당시 청원군 낭성면 무성리 태봉마을 이장인 이상린씨가 "집안에 내려오는 가보"라며 다락에 있던 고전적을 보여줬다. 영조태실 의궤는 이렇게 해서 세상에 빛을 봤다.

의궤에 의하면 △가봉에 사용된 석부재는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현암에서 채석됐고 △공사는 1729년(영조 5) 9월 12일에 시작해 그해 10월 15일에 종료됐다. 그리고 이때 충청도관찰사는 도내 각 군현에 인력과 잡물을 배당했다.

배당된 인력은 청주·충주에 각 2백54명(역군 2백명, 장인 14명, 승군 각 40명) 등 연인원 5천50명으로, 지리적으로 가까운 지금의 충북 사람들이 주로 동원됐다. 잡물은 청주목의 경우 소몽동(小夢同), 대착(大錯), 좌이(佐耳) 등이 배당됐다. 이들은 각각 작은 몽둥이, 줄, 짜귀 등을 의미하는 이두어다.

그러나 이씨의 집안이 영조태실의궤를 소장하게 된 경위는 불명확하다. 다만 여러 사료를 비교하면 그 대강의 경위를 파악할 수 있다. 일제가 조선왕실의 태실조사에 나선 것은 1910년대였고, 충청도지역 담당자는 '재천무언'(在川武彦)이라는 일본인이었다.

'이왕직 속 재천무언(在川武彦)을 충청남도와 충청북도 도청 직원과 함께 파견하여 양도에 있는 태실을 묻은 산의 부속지를 조사하여 경계를 정하도록 하였다.'-<순조부록 4년 11월 12일자>

전국의 태항아리는 그로부터 7년후 한양으로 옮겨졌다. 1928년 9월 10일자 <매일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창덕궁의 예식과 전사(典祀) 두 사람이 존귀하옵시던 어른들의 태가 무슨 지경에 갈지 모른다고"하여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명산에 묻힌 태실을 파서 경성으로 가져갔다.

이후 조선 역대 왕들의 태는 이듬해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삼릉은 효릉·희릉·예릉 등 왕실과 관련해 3개의 능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아일보> 1029년 3월 1일자가 관련 내용을 기사화했다.

'서삼릉 역내에 영구히 봉안하기로 되어 해동을 기다려 이안하리라는데 서삼릉은 철종 황제의 예릉, 인종대왕의 효롱, 장경황후 윤씨의 희릉을 모신 곳이라더라.'

<1872년 청주목지도>에 보이는 '胎封'(원) 지명.

영조의 태항아리도 이때 서삼릉으로 이전됐고, 남겨진 석부재는 파괴됐다.나아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불하에 의해 민간인이 영조 태실터의 산주가 되면서 관아(청주목)에 보관돼 있던 영조태실의궤가 어떤 이유로 이상린씨 선대에 의해 필사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편 <1872년 청주목지도>에는 태실이 있는 '태봉', 석부재를 채석한 '현암' 등의 지명이 '山內二下面'에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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