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웹출고시간2014.11.26 11:17:04
  • 최종수정2014.11.26 11:17:04
새마을운동은 1970년대 '조국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그 의도가 어떠했든 전통 속에 갇혀 있던 농촌과 농민을 단기간에 전환시켰다. 국민적 자신감을 회복시켜 '하면 된다'는 태도의 변화를 가져왔다. 참 놀라운 일이었다.

그 중심에 네 잎 클로버로 기억되는 4-H 운동이 있었다. 4-H라 함은 머리(Head), 마음(Heart), 손(Hands), 건강(Health)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의 머리글자(H) 네 개를 말한다. 각각 지(智), 덕(德), 노(勞), 체(體)로 번역해 사용하고 있다.

4-H운동은 지역사회와 국가발전에 기여케 하려는 일종의 사회교육 운동이다. 일반적으로 청소년 교육은 지육과 덕육, 체육에 역점을 둔다. 그런데 4-H운동은 여기에 노육(勞育)을 추가적인 교육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일반 청소년 교육과 조금 다르다.

충북에서는 엊그제 '35회 충북도 4-H대상 시상식'이 청주 명암타워 컨벤션센터에서 열렸다. 도내 4-H회원과 4-H지도자 및 관계자 등 250여명이 참가해 충북농업의 발전을 다짐했다. 충북농업의 미래를 이끌어갈 청년 영농인들의 1년 성과에 대한 포상도 이뤄졌다. 그동안 흘린 땀의 결실에 대한 보상인 셈이다.

4H-활동은 결코 과거가 아니다. 지금도 전국에서 10만여 명의 현역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세계 70여 개국이 참여하는 국제행사도 열리고 있다. 올해는 한국 4H본부와 미국 4H본부가 공동 개최하는 '제1회 글로벌4H네트워크 세계대회 2014'가 지난 2일까지 '청소년, 세상을 바꾸는 힘!'이란 주제로 서울올림픽파크텔과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렸다.

4H-운동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농촌은 물론 국가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1947년 경기도 일원에서 '4H구락부'란 이름으로 처음 시작돼 그동안 활동한 회원만 450만 명이다.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농업과 농촌, 환경과 생명의 가치를 창출하는 운동으로 바뀌었다.

4H-활동은 반세기를 넘는 세월 동안 우리의 농업과 농촌 발전에 이바지해 왔다. 그리고 지난 2007년 12월21일 법률 제8758호 한국4H 동지원법이 공포됐다. 이에 따라 한국4-H운동에 대한 체계적이고 효율적 지원도 가능해졌다. 한국4-H운동의 새로운 발전과 도전의 계기를 만든 셈이다.

우리는 이제 4-H운동이 관 주도에서 민간이 주도하는 민간화를 철저하게 지향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4-H회 활동 대상 및 사업 분야 확대를 통한 범국민적 운동으로의 다시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농촌 청소년 대상에서 도시와 농촌청소년을 포함하는 대한민국 청소년운동으로 그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국민에게 사랑받는 생활 속의 4-H운동으로 발전이 가능하다. 뿌리 깊은 나무는 가뭄에도 살아남게 마련이다.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아너 소사이어티 충북 72번째 회원' 변상천 ㈜오션엔지니어링 부사장

[충북일보] "평범한 직장인도 기부 할 수 있어요." 변상천(63) ㈜오션엔지니어링 부사장은 회사 경영인이나 부자, 의사 등 부유한 사람들만 기부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11월 23일 2천만 원 성금 기탁과 함께 5년 이내 1억 원 이상 기부를 약속하면서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의 충북 72호 회원이 됐다. 옛 청원군 북이면 출신인 변 부사장은 2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부모님을 도와 소작농 생활을 하며 학업을 병행했다. 그의 집에는 공부할 수 있는 책상조차 없어 쌀 포대를 책상 삼아 공부해야 했을 정도로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삼시 세끼 해결하지 못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아버지는 살아생전 마을의 지역노인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했다. 변 부사장은 "어려운 가정환경이었지만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자라왔다"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오늘날의 내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 졸업 후 옥천군청 공무원을 시작으로 충북도청 건축문화과장을 역임하기까지 변 부사장은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나아지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