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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의 현장 탐방 - 한국 구상화단의 신사 구자승 화백

대학 졸업후 홍익여고 미술교사로 8년간 재직
뛰어난 필력으로 표현한 생동감은 구 화백만의 구상화 양식
"대학교수 정년퇴직 후 작업만 하면서 변화된 작품 하고파"

  • 웹출고시간2014.07.10 16:27:34
  • 최종수정2014.07.10 16:27:34
독일의 예술학자 피들러는 "예술의 의미는 인간이 눈에 보이는 세계를 자기의식 속에 지니려고 할 뿐 아니라 인간의 본성, 그 자체의 특수한 활동형태라는 사실에 있다."고 하였다.

이 말은 예술이 우연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필연적인 것이다. 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미술사학가 보링거는 존재라는 진실을 표현하는 창조적 방식으로서 가장 근본적 표현방법인 '회화'란 두 가지의 극단적인 힘, 즉 '재현적인 것'과 '비재현적인 것'으로 구분된다고 하였다.

재현적이라 함은 두 말할 것 없이 '모방성'을 말함이오, 비재현적이라 함은 '추상성'을 말함이다. 20세기 이후 현대적 개념의 회화는 추상성에 훨씬 가까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두 가지 개념은 예술 속에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1960년대 중반 홍익미대는 미술교육사에 획기적이라 할 만큼 중요한 미술실기 교육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사물의 실체적 이미지를 표현하는 방법을 중시하던 '구상전공'과 추상성과 전위적 방식을 선호하는 '비구상전공' 반(班)으로 편성되고 전공반에 배정된 교수들을 학생이 선택하는 학생 중심 전공선택 제도이었다.

가장 이상적인 교육제도이면서 지금은 시행조차 할 수 없는 제도임을 생각할 때, 미술교육제도는 반세기 전보다 오히려 퇴보했지 않았나 싶다.

그 당시 군 제대 후 1학년 2학기에 복학해 필자에게 1년 선배이었던 구 화백께서는 현재 한국 서양화 구상화단의 최고의 원로작가이신 김숙진(金叔鎭) 교수와 중앙고등학교 미술부 사제의 인연에서 다시 대학 진학 후에도 전공 수제자로 지속되었다.

그 당시 약간은 현대미술의 진보적 양식이 유행을 할 때였기 때문에 많은 클라스 메이트들이 비구상반을 선호할 때, 구 화백은 박석호, 이마동, 김원, 김창억 교수로 진용이 갖춰졌던 구상반을 선택하게 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다. 지금은 상반된 양식의 작품을 하고 있지만 1965년 1학년 때 만난 클라스 메이트 장지원(여류화가)씨가 구 화백의 부인이다.

ⓒ 송봉화 다큐멘터리 작가
구 화백은 화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매우 건장한 체격의 미남이다. 화가의 모습보다 공직자 또는 사대부 집안의 군자의 이미지가 더 적합할지 모른다. 그 만큼 그의 모습은 단정한 모습이다.

그러나 구 화백에게도 예술가 가문의 혈통의 DNA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매우 중요한 가족사라 하겠다.

증조부 구연소(具然韶) 선생께서는 조선시대 정삼품의 벼슬을 하셨으면서도 문인화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부친 구인회(具仁會) 선생께서는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생활을 하면서 아마츄어 화가로 활동하였다.

대학졸업 후 1969년부터 홍익여고 미술교사로 부임한 후 8년간은 성실하고 헌신적인 자세로 미술교사 생활에 충실하였다.

그렇지만 교육자로서의 지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현실에 갈등이 증폭되기 시작하면서 조금은 늦은 나이인 30대 후반에 화가로서 동반자인 부인과 어린 자녀를 데리고 카나다로 유학을 떠난다.

미술교사로는 최고의 직장인 명문 홍익여고 미술교사 자리를 포기하고 유학을 떠나는 것은 구 화백에게 인생의 커다란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캐나다에서 최고의 미술대학인 OCA대학(Ontario College of Arts)을 부인 장지원 여사와 함께 입학하여 대학시절 3년 반에 이어 유학시절 4년 간 부부는 함께 클라스 메이트로 생활하게 된다.

부부가 함께 8년간을 학부시절과 대학원 과정을 클라스 메이트로 인생의 동반자가 된 경우도 보기 드문 기록일 것 같다. 구 화백께서는 지금 생각하면 공부하고 그림만 그리던 카나다에서의 유학생활 4년간이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고 회상한다.

ⓒ 송봉화 다큐멘터리 작가
유학생활을 거쳤지만 구상화 작업을 하던 형식이 바뀌진 안았지만 고전주의적 구상이 아닌 새로운 구상세계를 절감하게 되면서 구 화백은 독자적으로 새로운 구상화의 양식을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학부시절부터 이마동, 김창억 교수의 구상전공반을 거치면서 견고하게 형성되었던 작업 패턴을 바꾼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캐나다에서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상명여자대학교 미술과의 이건걸, 박희만 교수와 인연이 되어 잠시 강사 생활을 거친 후 1984년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그리고 예전 여학교 미술교사 시절과 달리 전문 과정의 교육자로서, 전공 제자를 가르치는 교수로서의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작가적 영역을 넓혀가게 된다. 대학 재학시절 추상 전공 교수와 구상 전공 교수 사이에서 고민했던 시절도, 재학시절부터 국전에 도전했지만 입선에 머물면서 공모전에 가졌던 거부감도 모두 구 화백에게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기고 본격적으로 구상화단에 참여하게 된다.

캐나다 유학을 다녀오고 세계미술은 현대미술의 큰 흐름 속에 요동치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구 화백이었기 때문에 잠시 실험 작품을 시도해보기도 했지만 체질적으로 구상 계열에 더 적합함을 느끼면서 결국 구 화백은 그의 인생의 스승이자 화가의 길로 자신을 인도한 스승 김숙진 화백(당시 신미술회 회장)의 커다란 품에 안기게 된다.

그가 화단에 처음으로 참여한 '신미술회'는 1974년 창립된 구상미술단체로 한국구상화의 대가 박득순, 김서봉, 김인승, 김창락, 이종무, 박영성, 이동훈, 임직순, 장두건 화백 등이 모두 신미술회 회원작가이었다.

ⓒ 구자승 作
인물화(유화, 드로잉 모두)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구 화백은 '인물작가회'으 회원으로도 활동하게 된다.

구자승 회화의 특징은 두 가지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의 회화는 단순히 시각적 인상만을 중시하는 사실화가 아니라 현대라는 시제(時題)를 인식하고 여백을 중시하는 공간적 개념으로서의 사유의 공간 속에 사물을 함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일종의 동양화적 공간에 실체와 환영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려운 환상적 실체감을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기법은 서양화인데 화면의 구성은 서양의 정물화와 달리 모티브를 화면 중심에 배치하여 배경을 여백으로 인식하게 하고 있다.

그것은 기법상으로 빛과 음영의 대비를 중시하고, 색채를 투명한 느낌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더욱 돋보이게 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그의 뛰어난 드로잉 작품에서 볼 수 있다. 드로잉은 시대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있다.

르네상스의 드로잉은 네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정확한 과학적 해석이 우선하고 있다. 19세기 고전주의의 대가 앵그르의 드로잉은 추상적 선으로 간결하고 아름다운 조형미를 표현하고 있다.


현대미술에서 드로잉은 마치 배양되고 있는 식물처럼 살아있는 생물처럼 상상의 연상작용을 갖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드로잉은 형태를 구속시키고 있는 데생과 반대로 형태를 해체시키고 있을 때 그 가치를 갖는다.

구 화백의 드로잉은 세 가지의 특징을 공유하고 있지 않나 싶다. 형태 인식의 감각과 뛰어난 필력으로 그의 드로잉은 생동감이 충만하고 있다.

구 화백은 이제 50년이 넘게 작가 생활을 한 한국 화단의 대가가 되었다.

약 10년 전, 여행 중에 우연히 알게 된 연고도 없는 충주 앙성면 조천리에 화실을 짓고 부인과 함께 둥지를 틀었다.

대학교수를 정년하고 작업만 하면서 또 한 번쯤 변화된 작품을 하고 싶다는 의욕을 보인다. 그리고 가장 존경하는 화가로는 그의 영원한 스승 김숙진 화백과 가장 훌륭한 화가로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 장지원 여사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글/김재관(미술학박사, 쉐마미술관장)

사진 /송봉화 다큐멘터리 작가

구자승 화백 주요 경력

- 서울에서 출생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 카나다 Ontario College of Arts 석사졸업
- 개인전 16회 개최(서울, 토론토, 광주, 오사카, 쇼몽, 베이징 등)
- 구자승·장지원 부부전 8회 개최
- 몬테칼로국제현대미술제 조형예술상
- 살롱 바이올렛 은상
- 오지호 미술상
- 옥조근조훈장(대통령상)
- 신미술회 회장
- 상명대학교 명예교수
- 화실 : 충주시 앙성면 조천리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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