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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의 현장 탐방 - 구상화가 신범승 화백

좋은 화가 되겠다는 집념
한 편의 영화 같은 인생

  • 웹출고시간2014.05.29 20:15:16
  • 최종수정2014.05.29 20:15:16
서양화가 신범승 화백은 충주병설중학을 졸업하고 충주사범을 졸업한 충주 출신 화가이다.

ⓒ 송봉화 다큐멘터리 작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고 이성과 감성이 형성되던 시기에 충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본인도 충주 사람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는 원래 지금은 북한 땅이 되어버린 38선 이북 황해도 사리원에서 1942년 태어났다. 해방되던 해에 남북분단이 된 직후 가족들은 충남 서산으로 피난을 하게 되고 부친은 그곳에서 경찰공무원이 되었다.

부친(신우선 씨)께서는 이북에서 한양으로 유학 와서 경기고보(현재 경기고)를 졸업하고 경성법대를 진학하였으니 대단한 엘리트였음을 알 수 있다.

서산에서 자유당 시절 경찰서 차석으로 근무했으니 위세가 대단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부친께서 전출이 잦게 되면서 신 화백은 초등학생, 중학생 시절을 대전, 홍성, 천안, 청주로 전학을 다녀야 할 만큼 학업 환경이 불안정했다.

초등학교를 여덟 곳이나 전학을 다녔고, 부친께서 청주경찰서 사찰분실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에는 천안중학에서 청주중학으로 전학 와서 2년을 다녔으나, 다시 충주로 전출하게 되면서 충주병설중학으로 전학해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신 화백이 충주사범을 졸업한 해는 1961년으로 전 학년을 다닌 것도 충주사범이 처음인 것이다. 사범학교 시절 미술반 활동에 열성이었던 그였지만, 졸업 후 첫 발령지는 경기도 이천 대월초등학교였다.

그러나 초등학교 교사 3년 중 1년 반 동안 중등학교 미술교사 자격증 취득 시험 준비에 매달린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명석했던 신 화백은 첫 시험에 합격을 하고 평택 효명종합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첫 발령을 받게 된다.

한 때 충주상고에서 미술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지만 1969년부터 서울에서 중등학교 미술교사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영등포고, 경기고, 서초여고, 중화고 등에서 근무하게 된다.

미술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그로써는 미술교사라는 전공 교사가 된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고 그 때부터 미술교육자와 화가의 길에 본격적으로 매진한 것이다.

그러나 신화백이 화가로서 성공하고자 하는 열망이 대단하였으나 그 의지를 실현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고 나가는 것만큼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요즈음은 화단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지만, 그 당시 1970년대 만 해도 화단은 홍익미대파와 서울미대파로 양분되어 있던 시기였고 국전 등 공모전에서는 서울대 출신과 홍익대 출신이 옥신각신하며 대상 수상자가 누구냐 하는 싸움판을 벌리고 있고, 또 한쪽에서는 반 국전파들에 의해 현대미술운동이 한창 시작되던 시기였다.

ⓒ 송봉화 다큐멘터리 작가
이 시기에 여타 대학 출신들과 지방대학 출신들의 등용은 실로 쉽지 않았다. 그 당시 국전의 폐단을 해소하고 한국화단의 새로운 미술운동의 붐을 일으킨다는 기치를 들고 시작된 민전(民展)인 '중앙미술대전' 공모전이 1978년 창설되었는데, 이 공모전에 정규 미술대학 출신이 아닌 신범승 화백께서 작품 '도자기 장수 이야기'를 출품해 양화부문에서 대상(大賞)이 없는 장려상을 수상하게 된다.

현재 화단에서 행세께나 하는 유명 화가들도 입선밖에 못 했으니 신 화백의 장려상 수상은 미술계를 깜짝 놀라게 한 대단한 사건이었다.

ⓒ 송봉화 다큐멘터리 작가
이 때, 신 화백의 작품은 서양화에서 이미 피카소의 입체파가 등장하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다다이즘과 개념미술이 등장한 이후 나타나는 추상표현주의, 팝아트 같은 현대미술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상파류의 사실주의도 아니고, 한국의 보수화단의 전형적인 화풍인 구상화도 아닌 그만의 독자적 화풍을 선보인 것이다.

홍익미대, 서울미대, 중앙대예대, 이화대미대 출신의 쟁쟁한 작가들의 경쟁을 뚫고 수상하였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새로운 조명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이후 신 화백은 미술계의 외곽에서 화단의 중심으로의 진입에 성공한다.

ⓒ 송봉화 다큐멘터리 작가
그리고 다시 학문적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40세부터 50세가 되기까지 10년에 걸쳐 동국대 교육대학원과 홍익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다.

1992년 제11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서양화 부문 대상을 수상하게 되면서 명실공이 공모전 스타 화가로 부상하게 된다.

그 후 대학 교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몇 개 대학의 교수 채용 심사에 도전한 끝에 1999년 동서울대학교 미술과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그의 나이 만 56세 때이므로 2008년 퇴임 때까지 꼭 10년을 교수로 재직하고 정년 하였다.

그의 일생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의 연속이었고, 그 도전은 늘 성공을 하게 될 만큼 그의 노력과 각오는 집요하였음을 볼 수 있다.

초등학교 교사에서 중등학교 미술교사로, 미술교사에서 공모전 수상작가로, 학점인정취득을 한 후 대학원 진학을, 다시 대학 교수로, 다시 박사학위(러시아 국립 헤르젠대학 미술교육학 전공) 취득을, 그야말로 사범학교를 졸업 후 50년이 넘는 동안 한 시도 쉴 새 없이 좋은 화가가 되겠다는 집념을 갖고 한 편의 영화 같은 인생을 달려온 것이다.

신 화백은 백남준이 말한 "예술은 사기다"라는 말에 대하여 대단히 흥미를 갖고 있음을 말한다.

사실 그 말은 예술은 예술이지 현실 속의 진실이 아님을 말하는 수사학(修辭學)적 표현이지만, 신 화백의 생각은 작가 감정의 진실한 표현이야말로 참된 예술이 아니냐 하는 생각을 말하는 것 같다.

화실 한 곁에 놓여 있는 추상화 소품 한 점이 보석처럼 나의 눈에 비쳤으나 정작 신 화백은 추상화에 대한 생각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렇다고 모방에 편승된 사실화에 대한 생각도 전혀 없음을 말하면서, 자신의 작품의 구상성은 재현이 아니라 자신의 개성을 중시한 변형된 구상이라고 말한다.

사실 신 화백의 그림은 그 만의 특유의 매우 빠른 필치로 표현되어 있다. 정치(精緻)하지 못하지만 자유로운 필치에서 해방감과 해학적인 느낌을 동시에 갖게 한다. 그것은 바로 동양의 기운생동과 생명력을 중시하는 그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한 특유의 화풍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지난 해 5월, 고향 충주시 가금면 중앙탑 근처에 '갤러리 중심고을'이라는 간판을 걸고 스튜디오 갤러리를 오픈하였다. 일주일에 며칠은 고향에서 생활하며 작품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만든 아틀리에 겸 갤러리이다.

신 화백은 앞으로 작품 형식의 큰 변화는 불가능하지만 모티프를 바꾸면서 새로운 작품을 하겠노라고 말한다. 최근에는 고향 주변의 풍경 이미지를 도입하기도 하고, 해(太陽)를 작품의 표상(表象)으로 즐겨 다루기도 한다.

신 화백은 판문점 비무장지대에 대한 관심을 자신만의 특유의 필치로 표현하고 싶다고 말한다. 독일 분단 장벽 같은 도회풍경을 그린 독일 화가 '조하온네스 하이시스'가 조국의 통일을 기원하며 그린 작품처럼, 신 화백은 통일을 기원하며 한반도의 분단된 비무장지대를 생명력 있는 필치로 한국적 정서를 담아 표현하고 싶어 한다.

그가 태어난 곳이 북녘 땅 황해도 사리원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통일에 대한 여망을 화폭에 담고 싶어 하는 또 다른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신 화백은 한국화단에 그 자신만의 독특한 필치로 '신범승 구상화풍'의 영역을 개척한 작가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글/김재관(미술학박사, 쉐마미술관장)

사진 /송봉화 다큐멘터리 작가

신범승 화백 주요 약력

1961년 충주사범 졸업
1976~84년 경기고 미술교사
1990년 홍익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1998년 러시아 국립 Herzen사범대학 미술교육학박사
1999~08년 동서울대학교 디자인학부 교수
1979년 제1회 중앙미술대상전 장려상 수상
1992년 제11회 국전 양화부문 대상 수상
2003년 충북미술대전 초대작가상 수상
현재 동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중국 연변대학 미술대학 객좌교수
현주소 충주시 가금면 중앙탑길 112-5 갤러리 중심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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