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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의 현장 탐방 - 클라식 음률로 생명성을 창조하는 서박이 화백

"손과 눈으로만 그리는게 아니라 함축된 마음으로 그려야"

  • 웹출고시간2014.05.01 18:25:01
  • 최종수정2014.05.01 18:25:25
충주는 충청북도의 제2의 도시다.
 

인구가 청주시의 삼분의 일이 안되지만, 조선 후기 도 관찰사가 처음 설치되었던 곳이라는 사실 때문에 시민의 자존심이 매우 강한 도시다. 충청도의 '忠'과 '淸'이 충주와 청주의 머리 자(字)를 따서 작명된 것처럼 충청도를 이야기 할 때 충주를 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더구나 '忠' 字가 한자 '中心'이 조합되어 있음에서 볼 수 있듯이 충주가 한반도의 중심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충주에 한국미술협회 충주지부 회원도 꽤 많고, 서울에서 활동하는 충주 출신 화가들도 적지 않음에도 이 곳 출신 작가로 현대미술로 인정받는 작가는 별로 없다.
 

그것은 그동안 대부분 아마추어리즘에 젖어 있는 작가들이 지역 미술계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지역 미술계에 20년 전에 동양화가 소원 문은희 선생이 이곳에 둥지를 튼 것처럼, 서양화가 서박이 화백이 1993년 에 이곳 살미면 팔봉 향산길 계곡에 둥지를 틀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허지만 이곳과 인연을 맺었으나 서 화백이 지역 미술계에 화가로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후 몇 해가 지나서였다.
 

서박이 화백은 훤칠한 키에 서구적 마스크를 가진 멋들어진 남자의 전형적 모습이다.
 

서 화백은 필자에겐 대학의 직계 대 선배이지만 그동안 개인적인 인연도 없었고, 그가 대학을 졸업한 후 20여 년간 화단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작가로서 만난 일도 없었다.

ⓒ 송봉화 다큐멘터리 작가
충주에 정통 현대미술을 하는 선배가 있다는 소식도 듣게 된 후 7~8년 전부터 우연히 만남을 가졌다. 그 후 서 화백의 초청으로 충주 살미면 냇가 산기슭 중턱에 자리 잡은 그의 화실을 방문하게 되었다.
 

또한 서 화백도 필자의 초청으로 청주를 몇 차례 방문하게 되고 청주에서 활동하는 후배들과 종종 교류를 가지면서 화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게 된다.
 

서 화백은 1940년 11월 일본 시즈오카(靜岡)현에서 태어났다. 뭔가 심상찮은 탄생의 비밀이 그에게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서 화백의 부친의 고향은 지리산 기슭 아래 경남 함양이다. 일제시대 돈 벌러 도일(渡日)하여 노동자 생활과 니어커에 귤을 싣고 장사를 하다가 고향에 있는 부인과 남매까지 데리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와서 본격적으로 장사를 하게 된다.
 

그런 중에 서 화백은 그곳에서 2남 2녀의 셋째로 태어나게 된다. 니어커로 시작한 장사가 잘 되면서 나중에는 오사카현립병원 앞에서 한국식 엿 공장을 운영하게 되고 한국에서 살던 이모, 숙모, 삼촌까지 일본으로 불러드리게 되고 사업은 날로 번창하게 된다.
 

그러나 해방을 맞게 되며 당시 다섯 살이었던 서박이도 부모를 따라 귀국하게 된다. 그러나 서 화백 가족의 기구한 운명은 다시 시작하게 된다.
 

중국 상인 배를 빌려 타고 귀국 도중에 선주가 도주하는 바람에 일본에서 번 전 재산을 잃게 되고 빈손으로 떠났던 고향에 다시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는 딱한 형편이 된다.
ⓒ 송봉화 다큐멘터리 작가
서 화백은 어린 시절 참 기구한 운명을 겪으면서 성장한다. 고향을 찾았으나 집도 절도 없고, 끝내는 국유지 텃밭을 일궈서 생활해야 했다.
 

그러나 장사수완이 뛰어나고 억척스러웠던 어머니의 힘으로 가정은 다시 일어서게 된다. 서 화백 모친께서는 농기구 장사를 하더니 나중에는 건자재 상회로 발전시키고 다시 시골에 60마지기 논을 부치게 되고 가정은 안정을 찾고, 고리대금까지 할 정도로 재산을 모으게 된다.
 

서 화백은 함양초등학교와 함양중학교를 졸업하고 함양고등학교에 진학하지만 2학년 초에 서울 휘문고등학교로 전학을 한다. 그
 

만큼 경제적으로 풍족해졌음을 알 수 있다. 휘문고를 졸업한 서 화백은 1959년 서울미대에 지원하였으나 실패하고 서라벌예대에 입학하였으나 대학생활이 성에 차지 않자 1학년을 마치고 김환기, 이봉상, 이종무 화백 등 당시 한국 화단 최고 명성의 교수진으로 편성되어 있던 홍익미대 서양화과로 편입한다.
 

1963년 올 A학점으로 대학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치지만 결혼과 생활을 위하여 화가의 길을 포기하고 뜻하지 않은 광산 사업에 손을 댄 후, 주식회사 '고려산업'을 창업하는 등 사업가로 성공한다.
 

그러나 서 화백의 운명은 다시 한 번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요구 받는다. 대학시절 그렸던 구상과 반 추상을 넘나들던 그림들과 회사를 운영하며 틈틈이 그렸던 그림들은 1981년 공장화재로 모두 소실되고 번창하던 사업마저 88서울올림픽 직전부터 광산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접게 된다.
 

비록 광산으로 돈을 벌어 예술아카데미를 설립하고자 했던 그의 원대한 꿈은 접게 되었지만, 운명처럼 서 화백은 다시 붓을 잡게 되고 화가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된다. 사업을 접은 서화백은 미국으로, 유럽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대학시절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워싱톤 내셔널미술관과 스미스온미술관의 현대미술을 보면서 받은 충격과 독일에서 몇 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느꼈던 새로운 지식들을 그의 그림의 근본으로 삼고자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한국의 정상급 원로 작가의 작품이 창의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또 한 번의 충격을 받게 된다.
 

서 화백은 비록 20여 년간 미술의 현장을 떠나있었지만 20대 가졌던 화가로서의 꿈을 배양하고 있었다함이 옳을 것 같다. 그가 붓을 놓고 있는 동안 그의 마음을 달래주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음악 - '심포니'와 '하모니'는 그의 새로운 그림 속의 소품으로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굴절 많은 삶 속에서 느껴왔던 '생명'의 가치는 씨앗이라는 생명의 이미지의 기호로서 작품의 모티브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여행을 즐겼던 음악적 감성과 광산산업에서 체험했던 물성에 대한 인식들은 작품 구성의 소중한 요소가 되어주면서 그의 새로운 작품들을 재미있게 해주고 있다. " 나는 요즈음 손과 눈으로만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함축된 마음으로 이미지를 그려야지 그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야 씨앗처럼 생명이 있는 그림이 되는 것 같아요~"라고 서 화백은 말한다. 최근 그의 그림에는 현대미술이 요구하는 몇 가지 재미있는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 서박이 화백 作
그의 그림의 특징은 그리는 기법과 판화처럼 찍어내는 스탬프(stamp)기법과 금속 오브제를 꼴라주로 활용하는 기법을 동시에 활용하고 있다. 스탬프기법은 팝아트의 거장 앤디워홀의 작품에서도 즐겨 사용한 표현기법이며 꼴라주 기법도 탈(脫) 타블로회화의 세계를 연 피카소 미술 이후에 많은 미술가들에 의해서 현대미술에서 즐겨 사용하는 기법이다.
 

그러나 음악을 좋아하는 서 화백의 회화는 분명히 또 다른 매력을 느끼게 한다. 가사가 있는 표제음악보다 베토벤의 교향곡처럼 클래식 음악을 즐기듯이, 구상 이미지가 배제된 절대추상회화를 그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의 추상세계는 20세기 초 말레비치가 추구하던 절대주의의 단색회화가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 정신이 추구하는 생명성을 클래식음악의 음률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내 인생에서 지금 충주에서의 삶이 가장 행복해요. 나에게 바람이 있다면, 서울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고, 컨테이너에 작품을 가득 싣고 미국 대륙을 횡단하며, 세계적인 평론가의 평론을 받고 전시하는 것이라오!" 하면서 이곳 충주에서 죽으나 사나 작품만 할 생각이라고 말한다. 그가 충주를 사랑하듯이 분명히 그 또한 충주를 사랑하는 이 지역의 대표적 현대미술가임이 분명하다.

글/김재관(미술학박사, 쉐마미술관장)

사진 /송봉화 다큐멘터리 작가

서박이 화백 주요 경력

-1940년 일본 시즈오카에서 출생
-경남 함양에서 성장함
-휘문고등학교 졸업
-홍익미대 서양화과 졸업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
-대한민국미술인상 수상
-미술대전 원로작가 초대전
-'미술로 말하다' 후기애스펙트전
-개인전 13회 개최
-충주시 살미면 팔봉향산길 '서박이 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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