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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맛, 스토리텔링 식탁에 오르다 - 해장음식 문화

청주에는 '해장국', 충주에는 '해장떡'이 유명했다
'해장국'의 직접적인 원조는 일제강점기 때의 '술국'
해장술, 고려~조선시대에는 '卯酒'와 '醒酒'로 표현
해장떡은 강나루터 아침상인이 호호불며 먹던 음식

  • 웹출고시간2013.07.29 19:14:51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술기운을 푼다는 의미의 '해장'은 '술'로도 풀 수 있고, 따근한 '국물'로도 풀 수 있다.

전자는 주당이 주로 하는 방법으로 '해장술', 후자는 일반인이 즐기는 방법으로 '해장국'이라고 표현한다.

'해장술'은 문헌상 고려시대부터 처음 보이기 시작한다.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동국이상국집에서 해장술을 이렇게 노래했다.

신윤복의 '주사거배'라는 그림이다. 그러나 주모가 술을 뜨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술국을 뜨고 있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해장술 느긋이 먹고 훈훈한 기운 볼에 가득하니(卯酒十分O滿O) / 연지 한 덩이 온 얼굴에 발랐는 듯(燕脂一顆抹渾顔) / 벌과 나비 나를 업신여기는구나(等閑蜂蝶應欺我) / 청춘을 헛보내면서 아직 느끼지 않는다고(虛度靑春尙未觀).'-<동국이상국집 제 3권>

굳이 원문의 한자를 함께 실은 것은 특정한 낱말을 눈여겨 보라는 뜻에서 이다.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한국의 셰익스피어'로 불릴 정도의 조선시대 대문호이다. 그도 해장술에 얽힌 감정을 시로 남겼다.

'깊숙한 주렴 장막에 낮 그늘은 기나길고(深深簾幕晝陰長) / 흰 갈옷 오사모 차림에 온몸이 서늘한데(白葛烏紗一頂O) / 해장술이 깨기도 전에 또 낮밥을 먹고는(卯酒未醒加午飯) / 돌아와서 방금 한바탕 낮잠에 빠져들었네(歸來方到黑甛鄕).'-<사가집>

인용한 두 개의 시 원문에는 특정 낱말이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다. 바로 해장술을 뜻하는 '卯酒'(묘주)이다. 이처럼 고려~조선의 전통시대에는 지금의 해장술을 아침 일찍 먹는다는 뜻에서 '묘주'라고 불렀다.

전통시간 개념상 묘시(卯時)는 십이시(十二時)의 넷째 시로, 오전 5시에서 7시까지를 의미한다. 지금의 주당들이 새벽 골목을 헤집고 다니는 것과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고려말기 고문헌인 '老乞大'(노걸대·줄국어 회화교본)에는 '성주탕'(醒酒湯)이라는 표현도 보인다. 이때의 '醒酒'(성주)는 '술을 깨게 하는 술'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해장술 의미와 같다.

따라서 한자를 표기 수단으로 가진 전통시대에는 '卯酒'가 보다 대중화됐고, 더불어 '醒酒'도 혼용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해장술과 관련된 일제강점기 표현은 주로 소설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우리고장 괴산이 낳은 한국문단의 거봉으로 홍명희(洪命熹·1888~1968)가 있다. 그의 대표작 '임꺽정'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

'(…) 삼봉이 형제는 해정술에 다시 취하야 배고픈 줄을 모르고 자는 손가가 제풀에 일어나도록 아침밥을 먹지 않고 기다렸다.'-<'임꺽정'(1933년), 454쪽>

같은 시기에 작품활동을 한 소설가로는 김동인(金東仁·1900~1951)은 '운현궁의 봄'을, 염상섭(廉想涉·1897~1963)은 '삼대'를 남겼다.

"왜 좀더 천천히 가시지요, 해정이나… ." 말을 계속하는 것을 흥선은 가로 막았다. "해정이 다 뭐요. 어서 가야지. 집에서는 눈이 빠지게 기다릴 터인데…."-<'운현궁의 봄'(1933년), 149쪽>

"너는 지금 앓는 아비를 보러 온 게 아니라, 해정을 하려고 술친구를 찾아다니는 거냐."-<'삼대'(1933년), 204쪽>

세 인용문에도 공통적인 낱말이 등장하고 있다. 바로 '쓰린 속을 푼다'는 의미의 '해정'으로, 한자로 쓰면 '풀 解', '숙취 酒+呈'의 '해정'이 된다. 어문 전문가들은 '해정'이라는 낱말이 '속=창자'의 의미로 오해되면서 지금의 '해장'(解腸)이 됐다고 밝히고 있다.

해장국은 '해장'에 '국'이 붙은 말이다. 해장국의 기원은 앞서 서술한 고려시대 '성주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성주탕이 대중화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대신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 '술국'이라는 낱말이 신문에 매우 자주 등장한다.

식문화 전문가들은 이 '술국'을 지금의 '해장국' 시원으로 보고 있다. 1981년 11월 24일자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얽매여졌던 밤의 4시간에서 풀려나와 모이는 곳인 해장국집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모습도 많이 바뀌었다. 해장국집의 역사는 지금의 청진동에서 나무시장이 서던 일제 강점시대 성밖에서 나무를 져다나르던 나무꾼들을 상대로하던 술국이 그 원조라고 한다.'

'얽매여졌던 밤의 4시간'은 지난 1982년 1월까지 존재했던 '야간통행금지'(자정~오전 4시)를 의미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해장국 문화의 발달이 야간통행금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그 다음 기사를 이렇게 썼다.

'술국에 밥이 곁들여져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갖춘 것은 9.28수복 이후로 미군과 함께 밀려들어온 서양바람과 사설댄스홀과 여관이 번창하던 이때부터 해장국집은 전성기를 누렸다.'-<동아일보 1981년 11월 24일자>

청주에도 남주동과 서문동 등을 중심으로 소고기와 콩나물 해장국이 발달하면서 전국적인 지명도를 지녀왔다. 이와 관련해 이같은 현상도 '야간통금이 없었던 충북'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도정 반세기'의 저자 이승우씨는 야간통금보다는 장날문화와 관련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인터뷰 참고)

청주에 해장국 문화가 발달했다면 충주에는 '해장떡' 문화가 발달했었다. 철도가 등장하기 전까지 충주는 내륙 항구도시였다.

경상(京商)들이 배에 물자를 싣고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이때 경상들은 가흥 등 강변마을에서 해장국 한그릇과 함께 손바닥만한 인절미에 팥고물을 두둑하게 묻힌 떡으로 요기를 하였다.

이 떡을 배고픔과 추위에 얼어 있는 장을 녹여주는 떡이라 하여 '해장떡'이라 불렀다. 그러나 술과 관련있는 것은 아니었다.

/ 조혁연 대기자

도움말: 충북도 농업기술원, 충북도 문화재계, 청주·충주문화원, 젠한국식문화연구소.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청주 해장국문화, 통행금지와 관련없어"

이승우

'도정반세기' 저자

청주에서 공직생활을 오래 했고, 또 '도정 반세기'(충청리뷰 간)의 저자인 이승우(82·사진) 씨는 '청주 해장국 문화가 야간통행금지 때문에 발달했다'는 주장은 크게 과장된 것이라고 말했다.

대신 그는 "청주 장날문화가 관련이 깊다"고 말했다. 특히 남주동 소고기 해장국의 경우 인근에 입지했던 푸줏간 거리와 관련이 많다고 말했다.

- 청주에 해장국 문화가 발달한 것은 80년대 초까지 있었던 야간통행금지와 관련이 있다는 얘기가 있는데.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그렇지 않다. 일제시대 때 홍수로 구시장(지금의 석교동 일대)이 페허화된 후 남주동에 신시장이 생겼다. 남주동 일대에 해장국 문화가 발달한 것은 이것과 관련이 있다."

- 구체적으로 어떤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상인들이 시장에서 재미를 보려면 좋은 장소를 차지해야 했고, 그러러면 새벽같이 일찍 시장에 나와야 한다. 남주동 해장국은 이들의 춥고 허기진 배를 상대하면서 유명해졌다."

- 남주동 상인 중 누가 가장 먼저 시장에 도착했던 것으로 기억하나.

"나뭇짐꾼으로 봐야 할 것 같다. 당시 명암저수지 근처의 사람들은 나뭇꾼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많았다. 또 미원이나 청천지역에서도 화목으로 쓸 나무를 팔러오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청주 동쪽 고개인 미테재를 주로 이용했다."

- 사실 해장국은 여러 종류이다. 그런데 청주 남주동에는 왜 소고기 해장국이 유명했나.

"근처에 우시장이 있었다. 그리고 남주동 난전 안에는 10여가구가 청주시내에서 유일하게 상설 푸줏간을 운영했다. 여기서 남주동 해장국의 식재료가 곧바로 공급됐다."

- 서문동은 콩나물 해장국이 유명했다. 여기는 왜 소고기가 아니고 콩나물인가.

"70년대 들어 우리나라 해장국은 선지, 북어, 황태, 올갱이, 콩나물, 뼈다귀 등 다양하게 분화했다. 그 즈음에 생겨난 것이 서문동 콩나물 해장국이다. 콩나물은 해장국 식재료 중 가장 흔한 편이다."

☞동동주와 고주망태의 어원

동동주, 한문 '동두주'가 변한 표현이다

"입안에서 착착 감기는 술", 또는 "앉은뱅이 술". '동동주'를 두고 하는 말이다. '동동주 술타령이 오동동이냐'라는 노랫말도 있다.

뒷말 '주'는 분명히 한자 '술酒' 자에서 온 말이다. 그러나 앞말 '동동'은 그 뜻을 알기가 쉽지 않다. 혹자는 밥알이 동동뜨기 때문에 동동주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 막걸리에는 밥알이 뜨지 않는데, 동동주에는 밥알이 동동 뜨고 있다. 그러나 앞말 '동동'은 한자에서 온 말이다. 17세기에 간행된 '역어유해'라는 고문헌은 동동주를 '주자에서 갓 떠낸 술을 고조목술'이라고 적었다.

국어학자들에 따르면 이 고조목술의 한자 표기가 동동주이다. 원래는 '동 銅', '머리 頭', '술 酒' 자를 써서 '동두주'로 불렀다. 이후 음운변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지금의 '동동주'가 됐다.

동동주의 중국식 표현도 재미있다. '뜰 부'(浮), '개미 의'(蟻), '술 주'(酒) 자를 써서 '부의주'라고 표현한다. 밥알이 개미처럼 떠있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으로 보인다.

고주망태, 술을 짜거나 거르는 틀을 말한다

'고주망태'는 술을 매우 많이 마셔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객관적인 묘사를 한 말이 아닌, 비유적인 표현이다. '고주망태'는 '고주'와 '망태'가 결합된 말이다. 이중 '고주'는 술을 짜는 틀을 말한다. 한자 중에 '고주 槽(조)' 자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망태'는 '망태기'의 준말로 가는 새끼나 발로 엮어 만든다.주로 술을 거르는데 사영된다. 바로 ·고주망태'는 술을 거르거나 짜는 기구를 말한다.

이같은 행동이 반복되는 기구인 '고주망태'는 액체 술을 피하지 못하고 항상 젖어 있어야 한다, 사람이 그같은 경우가 되면 정신을 잃지 않을 수 없다. '고주망태'는 그래서 생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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