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티고개, 일제에 대한 저항의 역사도 간직

2016.07.24 15:51:44

조혁연 객원 대기자

보은군이 말티고개에 '속리산 수학여행 1번지'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말티고개 하면 떠오르는 것이 '꼬부랑 길'이다. 말티고개의 노폭을 확장하고 선형 개량을 처음 시도한 관료는 1920년대 충북도지사를 지낸 박중양(朴重陽·1872-1959)이다.

박중량의 일본식 이름은 '호추시게요'(朴忠重陽)로, '신념적 친일파'라고 불릴 정도로 친일의 행각이 뚜렷하다. 1923년 2월 충청북도지사에 부임한 박중양이 말티고개 확장공사를 처음으로 하게 된 데는 유람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이 작용했다.

1923년 4월 1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박중량은 도내 순시를 이유로 화양동 등 괴산군내 명승지를 무려 7일 동안 구경하고 도청으로 돌아왔다. 그가 말티고개를 넘으려 한 것은 역시 법주사를 유람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됐다. 그는 말티고개 입구에 이르러 소를 끌어오도록 명령했고, 그 이유는 "도지사인 내가 어찌 흙을 밟을 수 있느냐"였다.

<동아일보> 6월 16일자. '임농부역에 분노한 농민, 기수와 순사를 난타' 등의 제목이 보인다.

'당대의 일도 소관으로서 엇지 차에서 내려 흙을 발브랴하는 생각이 드럿는지 박중양 씨는 긔어코 차에서 나리지를 안코 촌가에 가서 소를 꺼러다가 자동차를 꺽러넘기게 한 결과 겨우 도지사의 위엄은 직히게 되얏섯다.'-<동아일보 1923년 6월 16일자>

박중양은 바로 이때 당시 김재호 보은군수에게 군민 부역을 통해 말티고개 노폭을 확장하도록 명령했다.

'지사의 명령이라 일개 군수로서 억이는수업스닛가 김군수는 즉시 금월 초순부터 부역을 푸퍼 공사를 시작하얏는대 본시 이 고개는 비록 자동차는 통행치 못하나 인마는 임의로 통행되는 곳이며 그 고개는 다만 속리산 법주사 외에는 다시 통한 곳이 업는 주요치 안은 길이엇다.'-<〃>

6월 중순은 폭염이 막 시작되는 시기로, 군민들을 부역에 동원하기에는 계절적으로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회남과 회북면민들은 백리를 걸어서 말티고개의 부역장으로 출퇴근을 해야 했고, 날이 갈수록 불만이 누적됐다.

'그러나 지사의 분부임으로 전군 만여호의 부역을 풀게 되는 때는 마참 첫 여름임으로 농가의 뎨일 밧분 때이다. 일반 인민들은 백성의 생명을 보장하는 농사를 못짓게 하고 이 길을 닥글 지급한 필요가 어대잇는가 하야….'-<동아일보 1923년 6월 16일자>

이같은 불만은 보은지역 부역자들이 당시 일본 토목기사와 순사를 집단 구타하였고, 그러자 충청북도 경찰부까지 출동하는 사건으로 발전하였다.

'삼백여명 인민들은 마참내 그 기수에게 몰녀드러 란타를 하고 그 싸흠을 말니랴하든 순사 세 사람까지 란타를 하야 중상을 당하게 하얏다. 이 급보를 들은 보은경찰서는 충청북도 경찰부의 응원까지 청하야 전원 총출동으로 현장에 급행하야 임의 사십여명을 검속하고 목하 계속 검거 중이니 사건의 전도는 매우 위험다라더라(보은).'-<〃>

말티고개는 고려 태조 왕건, 조선 세조 등 전통시대 국왕들이 찾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그러나 이상에서 보듯 말티고개는 일제강점기 보은군민들이 대거 동원돼 도로확장 부역을 했던 애환의 고개이고, 일본 토목기사·순사에 항거했던 저항의 공간이기도 하다.

말티재 전시공간에는 이런 내용들이 모두 들어가야 할 것으로 보이다. 그나저나 말티재 정상에 있던 비석들이 꼬부랑 길 조성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있다.

/ 충북대학교 사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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