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공민왕은 조령을 넘어 피신했을까

2016.05.17 15:24:18

조혁연 객원 대기자

고려 공민왕 10년(1361) 11월 홍건족(紅巾族)이 쳐들어왔다. 홍건족은 머리에 붉은 두건을 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들은 오랑캐가 아닌 한족이었다. 홍건족이 빠른 속도로 남진하자 공민왕은 겨우 28명의 신하만 데리고 황급히 개경 도성을 빠져나와 몽진에 올랐다.

국왕의 도피는 피난이 아닌 몽진(蒙塵)으로 표현했다.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 썼다는 뜻으로, 궁궐의 편안한 생활과 대비되는 표현이다. 음력 11월은 겨울의 초입에 해당하는 시기로, 어가가 경기도 이천에 당도하자 진눈깨비가 내렸다. 공민왕은 젖은 옷을 모닥불에 말려야 할 정도로 몽진은 비참했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가운데 어가가 이천현(利川縣)에 당도했는데 비에 젖은 왕의 옷이 얼어붙자 장작불을 피워 한기를 막았다.'-<고려사 세가 공민왕 10년 11월 신미일>

우리 민족의 침략사 가운데 가장 잔혹한 장면의 하나가 이때 벌어졌다. 《고려사》의 기술에 의하면 당시 홍건족의 잔혹한 행동은 야만의 극한에 달했다.

'이날 적군이 개경을 함락한 후 수 개월 동안 진을 치고 머물면서 말과 소를 죽여 그 가죽으로 성을 쌓고는 물을 뿌려 얼음판을 만들어 아군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했다. 또 남녀 백성들을 죽여 구워 먹거나 임신부의 유방을 구워 먹는 등 온갖 잔학한 짓을 자행했다.'-<〃>

공민왕은 조선시대 동래로(영남대로)에 해당하는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몽진을 계속, 그해 12월 임진일에 복주(지금의 안동)에 도착하였다. 몽진 루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개성의 도성 출발→ 분수원(경기도 파주)→영서역(양주)→사평원(경기도 광주)→경안역(〃)→이천현→음죽현(장호원)→충주(11월 을해일)→경상도 용궁→복주(12월 임진일).

공민왕이 안동을 피난지로 택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고려말은 왜구의 극성기로 해안쪽은 안전을 담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안동은 백두대간 이남에 위치하고 있어, 홍건족의 남하를 방어하는데 유리했다. 당시 우리고장 충주에서 안동을 가려면 계립령이나 조령〔새재〕을 넘어야 한다.

공민왕이 두 고개 가운데 어느 영로(嶺路)를 기나갔는지는 분명치 않다. 《고려사》에는 이 부분이 매우 소략하게 기록돼 있다.

《고려사》 공민왕 10년 11월 을해: 어가가 충주에 당도하였다(駕次忠州).

《고려사》공민왕 10년 12월 임진: 복주에 도착한 왕이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삼아 교서를 내려 파견했다(王至福州 以鄭世雲爲摠兵官 賜敎書 遣之).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누정조.

일단 공민왕은 두 곳의 백두대간 영로 가운데 조령을 넘어 안동으로 향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누정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백문보(白文寶)의 금방기(金榜記)에, "신축년 겨울 11월에 임금이 난을 피하여 가다가 복주에 이르렀다. 처음에 충주·광주로부터 조령(鳥嶺)을 넘으니, 관리들과 백성들이 난리에 당황하여 놀란 노루와 숨은 토끼처럼 되어서, 손발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였다. 비록 명령할지라도 걷잡을 수 없어서 임금이 마음으로 근심하였는데, 조령에 올라서 내려다보니 넓고 멀고 아득하여서 마치 천지가 가로놓인 것 같은 것이 (중략).'

그러나 이는 한국고전번역원의 번역으로 원문은 '忠廣而踰嶺'(충광이유령), 즉 '충주와 광주로부터 고개를 넘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 충북대학교 사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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